연합뉴스'왕이 어리석으면 어찌할 것인가?'
조선 건국의 설계자인 정도전의 문제의식이었다.
적장자(嫡長子) 원칙이 확고한 조선 왕실에서 현명하고 어진 인물만 나오라는 법이 없기 때문이었다.
정도전은 이에 따라 신권(臣權)을 강화하고 관료 집단이 왕과 왕위 계승자들을 집중 교육하도록 했다.
우둔한 자가 왕위에 오르더라도 실력이 검증된 관료 집단이 교육을 통해 임금을 제어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정도전의 생각대로 조선은 왕위 계승자에 대한 교육에 진심이었다.
원손 시절부터 보양청, 강학청 등 전담 교육기관에서 학습받고 세자가 되면 시강원 등에서 교육받았다.
왕이 되서도 하루 3번 의무적으로 관료들과 공부를 해야 했다.
아침 공부인 조강은 새벽 6시부터, 낮 공부인 주강은 정오 쯤, 저녁 공부인 석강은 오후 7시 쯤이었다고 한다.
학구열이 높은 왕들은 '야자(야간 자율학습)'격인 야대(夜對)도 했다.
조선 왕들의 교육 과목은 '경(經)'과 '사(史)'였다. 유교 경전과 역사를 배움으로써 이상과 현실의 조화를 꾀하려 했던 것이다.
조선 왕조가 전쟁과 당쟁 속에서도 500년을 지속할 수 있었던 원동력으로 제왕 교육 시스템을 꼽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만약 왕과 신하가 똑같이 어리석다면 나라는 어떻게 될까?
우리는 지난 연말 이런 상황을 접했다.
'공산 전체주의 위협'과 '부정선거론'이라는 망상에 빠진 대통령과 이를 바로잡기는 커녕 동조했던 고위 관료들의 비겁함으로 대한민국은 백척간두로 순식간에 떠밀렸다.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것은 민주공화정이었다.
야당을 중심으로 국회가 발빠르게 움직여 계엄 선포 3시간 만에 계엄을 풀어버렸다.
만약 12.3 불법 계엄 당시 국회가 신속하게 소집되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의 추락은 불보듯했을 것이다.
지난 3일 국회는 계엄법 개정안을 가결처리했다.
계엄이 내려져도 국회의원과 국회 소속 공무원의 국회 출입과 회의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하고 군경의 불법적인 국회 출입도 금지하는 내용이다.
아울러 계엄 선포 심의 국무회의록도 계엄 선포 때 국회에 제출하도록 하는 내용이다.
87년 6월 이후 사문화된 것 같았던 계엄법을 30여년 만에 손봐야 하는 현실이 씁쓸하지만 민주공화정의 지속을 위해서는 해야 할 일이다.
왕과 신하가 어리석은데 백성마저 어리석다면 그 나라의 미래는 비관적이다. 망상과 진영 논리에 오염되지 않은 참된 민주주의에 대한 부단한 교육과 성찰도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