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인 5명이 함께 참업한 정담 내부. 권민철 기자불과 7~8년 전, K(50대)는 한강의 다리 위를 서성였다. 삶을 끝내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세상과 등을 지고, 나 자신을 가장 미워하던 시기였다"고 회상했다.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해 노숙을 전전하던 그가 절망의 끝에서 붙잡은 것은 '희망의 인문학' 수업이었다.
'희망의 인문학'은 노숙인과 취약계층이 자존감을 회복하고 지역사회에서 자립할 수 있도록 돕자는 취지에서 서울시가 마련한 프로그램. K는 인문학 강의에서 처음으로 자신을 돌아봤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조금씩 마음을 열었다. 수업 전 함께 먹을 식사를 준비하며 자연스럽게 요리를 맡게 됐다. 그 과정에서 막연히 '창업'도 꿈꾸었다. 혼자서는 엄두도 못 냈지만, 뜻이 맞는 사람들이 함께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K는 이제 서울역 인근 집밥 음식점 '정담'의 공동 운영자다.
P(50대)는 이혼 후 두 아이와 함께 노숙 생활을 했다. 고시원으로 옮긴 뒤에도 삶은 녹록지 않았다. 뇌전증으로 장애 판정을 받았고, 우울증 약을 복용하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그는 "아이들을 키우며 살아남는 게 목표였지, 미래를 그릴 여유는 없었다"고 했다.
그 역시 '희망의 인문학' 수업을 통해 삶의 방향을 바꿨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과정을 다시 마쳤고, 붕어빵 장사와 식당 허드렛일로 생계를 이어갔다. 기초생활수급자가 됐지만, 그는 결국 수급 종료를 선택하고 창업에 도전했다. "누군가의 도움에만 머물지 않고, 아이들 앞에서 당당해지고 싶었다"는 이유에서다.
그 역시 '정담'의 공동 운영자다. K, P외에 '희망의 인문학' 수료생 3명이 함께 한다. 식당의 메뉴엔 스스로를 다독이고 손님을 위로하겠다는 마음이 담겼다. 뚝배기 닭볶음탕 '뚝닥뚝닭', 토마토 닭요리 '토닥토닭'. 5명의 상처와 회복의 시간을 닮은 이름이다.
정담의 대표 메뉴. 서울시 제공 서울시는 이들의 창업까지 체계적인 준비를 제공했다. 전문 셰프의 조리 교육, 창업 아카데미, 현장 멘토링을 거치도록 해 '장사'가 아닌 '가게 운영'을 교육했다. 단순한 일자리가 아닌, 다시 무너지지 않기 위한 자립의 기반을 깔아주려했던 것이다.
서울시는 '정담' 같은 '동행스토어'를 순환형 창업 모델로 키운다는 계획이다. 한 팀이 독립하면 또 다른 수료생이 그 자리를 이어받는다. 노숙인에서 식당 사장님이 된 이들의 이야기가 예외가 아닌 '경로'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다.
서울시는 16일 동행스토어 1호점 '정담(후암로 57길 37-3)' 개소식을 열었다. 이달 안에 2호점 '내 생애 에스프레소'를 영등포보현종합지원센터에, 3호점 뜨개질 카페 '이음'을 서울역 인근에 열 예정이다.
오세훈 시장은 이날 '정담' 개소식에 참석해 "서울시 약자와의 동행은 '누군가의 도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변화를 만들어가는 주체로 서는 것'"이라며, "취약계층이 스스로 변화를 만들고 지역사회에 안정적으로 뿌리 내릴 수 있는 정책을 꾸준히 실천해 나가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