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사업장 변경을 요구하거나 임금체불·괴롭힘 등 노동 문제를 제기한 이주노동자를 상대로 사업주가 손해배상이나 숙식비 반환을 청구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노동계는 이 같은 소송이 이주노동자의 정당한 권리 행사를 옥죄는 수단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우려한다.
사업장 떠났더니 제기된 소송…"사업손실금까지 토해내라"
7일 CBS노컷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경기 파주의 한 제조업체는 최근 방글라데시 국적 노동자 A씨를 상대로 530만원 상당의 손해배상 조정신청을 제기했다.
회사는 A씨가 사업장 변경을 위해 고의적으로 태업을 했고, 이로 인해 외주비용 등 손해가 발생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A씨 측은 사업주가 반복적으로 폭언을 하고 공장 밖에 장시간 세워두는 등 괴롭혔으며 폭행까지 가했다고 주장한다. 이 같은 이유로 사업장 변경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사업장 변경을 둘러싼 손해배상 분쟁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강원 지역의 한 축산농가 운영자는 캄보디아 국적 노동자 B씨를 상대로 5130만원 상당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B씨가 근로계약을 위반하고 사업장을 무단 이탈해 손해를 입었다는 이유였다.
사업주는 숙박비와 통신비, 마약검사비, 취업교육비는 물론 노동자 이탈로 한우 육질과 육량이 악화돼 경매 낙찰가가 떨어졌다는 취지의 사업손실금까지 청구했다.
하지만 법원 판단은 달랐다. 춘천지법은 사업주가 노동자 B씨에게 임금을 체불한 사실이 인정된다며, B씨의 사업장 이탈을 '무단이탈'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피고는 원고의 임금체불에 따라 사업장을 이탈함으로써 명시적 또는 묵시적으로 근로계약을 해지한다는 의사를 표시하였다고 봄이 타당하다"며 "피고가 그 귀책사유로 근로계약을 위반해 근무기간 중 무단으로 원고의 사업장을 이탈하였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고 밝혔다.
또 사업주가 청구한 숙식비와 통신비, 마약검사비, 취업교육비, 사업손실금에 대해서도 모두 인정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마약검사비 및 취업교육비는 사용자가 외국인근로자를 고용하기 위해 지출해야 하는 비용"이라며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사용자가 부담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한우 육질·육량 저하에 따른 사업손실금 청구에 대해서도 "피고의 근로계약 위반으로 인해 한우의 육질 및 육량이 악화됐다고 인정하기 부족하다"고 봤다.
"신고해도 끝이 아니다"…권리구제 뒤 따라오는 민사소송
연합뉴스노동계는 이 같은 소송이 단순한 금전 분쟁을 넘어 사업장 변경 등 권리 행사를 위축시키는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고 본다.
윤진규 샬롬의집 사무국장은 CBS노컷뉴스와의 통화에서 "그동안은 이주노동자들이 노동청에 신고하지 못하거나 권리구제를 받지 못하는 어려움에 집중해왔다"며 "그런데 이번 사례들은 어렵게 신고하고 권리구제를 받아도 끝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사업장 변경이나 임금체불 진정 자체도 쉽지 않은데, 그 이후 민사소송이나 지급명령이 뒤따르면서 이주노동자들이 또 다른 부담을 떠안게 된다는 취지다.
윤 사무국장은 "민사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사실상 보호 대책이 전무하다"며 "한국어로 된 어려운 법률문서를 짧은 기간 안에 이해하고 대응해야 하는데, 문화도 다르고 주소도 불안정한 이주노동자들이 이를 감당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소송보다 무서운 압류…출국만기보험금까지 묶일 수 있어
전문가들은 이 같은 소송이 실제로 받아들여지는지 여부와 별개로, 소송 제기 자체가 이주노동자에게 큰 압박이 된다고 설명한다.
특히 사업주가 1심에서 승소한 뒤 급여나 출국만기보험금 등을 압류할 경우, 이주노동자는 즉각적인 생계 타격을 입는다. 출국만기보험은 외국인 노동자가 일정 기간 근무한 뒤 출국할 때 받을 수 있는 일종의 퇴직금 성격의 돈이다.
윤 사무국장은 "단순한 위협이 아니라 굉장히 파괴적"이라며 "월급이 압류되면 최저생계비를 제외한 금액이 묶이는데, 이주노동자들은 본국 가족에게 보내야 할 돈을 보내지 못하게 된다"고 말했다.
이어 "현재 일하고 있는 회사의 급여가 압류되면 새 사업장에서도 이 노동자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생길 수 있다"며 "사업장 변경 이후 남은 체류기간 전체에 고통을 줄 수 있는 금액이 청구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최정규 변호사(법무법인 원곡) 역시 "사업주가 1심에서 승소해 급여나 출국만기보험금 등을 압류하면 이주노동자는 즉각적인 생계 타격을 입게 된다"며 "이후 항소심에서 판결이 뒤집히더라도 이미 압류된 돈을 돌려받기 위해 또 다른 소송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 민사소송에서 추완항소(기간 내 항소를 못 한 데 귀책사유가 없다며 뒤늦게 제기한 항소) 등으로 항소심 결과가 뒤집히더라도 이미 압류·추심이 이뤄진 돈을 돌려받으려면 부당이득반환청구 등 별도 절차가 필요할 수 있다. 법률 조력을 받기 어려운 이주노동자 입장에서는 소송 하나가 끝나도 또 다른 소송을 감당해야 하는 셈이다.
이주노동자들은 언어 장벽과 불안정한 주거 환경 등으로 민사소송 대응에 특히 취약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사업장 변경 과정에서 실제 거주지와 외국인등록상 주소가 달라지는 경우가 적지 않고, 소장이나 지급명령서 등 법률문서를 제때 전달받지 못하는 사례도 발생한다. 법률구조 지원 역시 주로 임금체불 사건에 집중돼 있어 손해배상 소송에 휘말린 이주노동자들은 적절한 법률 조력을 받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최 변호사는 "이주노동자는 주소지가 사업장과 연결돼 있는 경우가 많고, 공시송달이나 보충송달로 재판이 진행되면 소송 사실 자체를 알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며 "추완항소 제도가 있어도 이를 활용하기 쉽지 않은 만큼, 현행 송달 체계와 법률지원 제도를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