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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노(推奴)’- 두 전란이 빚은 비극적인 인간사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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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궁 전각에 얽힌 재미있는 뒷 얘기 시리즈⑫ 창덕궁 인정전

창덕궁 인정전의 야경. 조선 후기 대표적인 정치무대이기도 하다. 국보 225호로 지정됐다. (자료제공=문화재청)

 

▲백성을 버리고 한양을 떠난 임금

1592년 4월 30일. 선조가 인정전 앞뜰에 내려섰을 때 하늘에서는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전황(戰況)은 급박했다. 조선을 침략한 왜구들의 기세는 파죽지세, 무기력한 조선의 방백과 군사들은 제 목숨 살리기에 바빴다.

불과 나흘 만에 충주가 함락됐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무능한 조정은 갑론을박 논쟁만 벌일 뿐이었다. 목숨을 걸고 한양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과 일단 숨을 골랐다가 명나라의 도움을 구해야 한다는 의견이 팽팽히 맞섰다.

임금은 결국 피난길에 나섰다. 몽진(蒙塵)에 나서는 날,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임금의 도피길에 따라 나선 문무관은 백명도 채 되지 않았다. 심지어 궐문을 지키던 장수들마저 임금을 따라나서지 않고, 원망과 함께 제 갈길로 가버렸다.

최근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불의 여신 정이'에서 등장하는 선조의 모습. 당당하고 권위적인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지만, 임진왜란을 몸으로 겪은 불행한 임금이다.(자료화면에서 캡쳐)

 

벽제관에서 일행은 점심을 먹었다. 임금과 중전에게는 겨우 상을 차려 올렸지만, 세자는 맨밥에 반찬조차 없었다. 그만큼 황망하고 다급한 탈출이었다.

한편 임금이 도성을 버리고 탈출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도성의 백성들은 불안에 떨기 시작했다. 불안이 원망으로 바뀌는데는 시간이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궁궐에서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장례원 쪽이었다. 장례원은 조선의 노비문서를 관리하는 곳이다. 곧바로 선혜청에도 굶주린 백성들이 난입했다. 선혜청은 쌀과 포의 출납을 관리하는 곳이다.

민초들에게 전란(戰亂)은 오히려 수탈과 억압된 신분구조를 바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장례원과 선혜청을 시작으로 약탈과 방화가 이어졌다. 경복궁과 창덕궁, 창경궁이 모두 불에 탔다. 역대 왕들의 실록은 물론이고, 승정원일기가 모두 타버렸다. 조선의 역사가 모두 허물어진 것이다.

궁궐의 화재가 민초들의 행위가 아니라, 왜구의 소행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궁궐의 피습은 당시의 피폐하고, 억압된 사회구조를 투영하는 것은 분명하다.

몇해전 방영된 드라마 '추노'의 한장면. 노비를 쫒는 노예사냥꾼의 얘기를 그린 드라마다. 실제로 조선에는 노비를 잡기 위한 '추쇄도감'이라는 기관이 존재했다. (자료화면에서 캡쳐)

 

▲‘추노(推奴)’- 두 전란이 빚은 비극적인 인간사냥

몇 해전 방영된 ‘추노’라는 드라마는 말 그대로 노예사냥꾼에 관한 얘기다. 단순히 노비 사냥이라는 이색적인 소재뿐 아니라, 이 드라마는 당시의 피비린내나는 치열한 정쟁과 복잡한 사회상을 아주 밀도있게 그려냈다.

임진왜란으로 잿더미가 된 조선의 임금이 된 것은 광해군이었다. 명나라의 도움으로 조선의 조정은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게 됐지만, 여진족(후금)의 나라는 명나라마저 집어 삼킬 태세였다.

적절한 등거리 외교를 펼친 광해군 시절, 조선은 그나마 불안한 평온을 유지했지만, 서인세력을 등에 업은 능양군(인조)의 반정으로 광해군은 옥좌에서 쫒겨 났다. 후금(청)을 오랑캐라 배척한 인조와 서인 세력의 어처구니없는 외교실책은 결국 병자호란이라는 엄청난 전란을 또 다시 불러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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