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인정전의 야경. 조선 후기 대표적인 정치무대이기도 하다. 국보 225호로 지정됐다. (자료제공=문화재청)
▲백성을 버리고 한양을 떠난 임금1592년 4월 30일. 선조가 인정전 앞뜰에 내려섰을 때 하늘에서는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전황(戰況)은 급박했다. 조선을 침략한 왜구들의 기세는 파죽지세, 무기력한 조선의 방백과 군사들은 제 목숨 살리기에 바빴다.
불과 나흘 만에 충주가 함락됐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무능한 조정은 갑론을박 논쟁만 벌일 뿐이었다. 목숨을 걸고 한양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과 일단 숨을 골랐다가 명나라의 도움을 구해야 한다는 의견이 팽팽히 맞섰다.
임금은 결국 피난길에 나섰다. 몽진(蒙塵)에 나서는 날,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임금의 도피길에 따라 나선 문무관은 백명도 채 되지 않았다. 심지어 궐문을 지키던 장수들마저 임금을 따라나서지 않고, 원망과 함께 제 갈길로 가버렸다.
최근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불의 여신 정이'에서 등장하는 선조의 모습. 당당하고 권위적인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지만, 임진왜란을 몸으로 겪은 불행한 임금이다.(자료화면에서 캡쳐)
벽제관에서 일행은 점심을 먹었다. 임금과 중전에게는 겨우 상을 차려 올렸지만, 세자는 맨밥에 반찬조차 없었다. 그만큼 황망하고 다급한 탈출이었다.
한편 임금이 도성을 버리고 탈출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도성의 백성들은 불안에 떨기 시작했다. 불안이 원망으로 바뀌는데는 시간이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궁궐에서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장례원 쪽이었다. 장례원은 조선의 노비문서를 관리하는 곳이다. 곧바로 선혜청에도 굶주린 백성들이 난입했다. 선혜청은 쌀과 포의 출납을 관리하는 곳이다.
민초들에게 전란(戰亂)은 오히려 수탈과 억압된 신분구조를 바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장례원과 선혜청을 시작으로 약탈과 방화가 이어졌다. 경복궁과 창덕궁, 창경궁이 모두 불에 탔다. 역대 왕들의 실록은 물론이고, 승정원일기가 모두 타버렸다. 조선의 역사가 모두 허물어진 것이다.
궁궐의 화재가 민초들의 행위가 아니라, 왜구의 소행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궁궐의 피습은 당시의 피폐하고, 억압된 사회구조를 투영하는 것은 분명하다.
몇해전 방영된 드라마 '추노'의 한장면. 노비를 쫒는 노예사냥꾼의 얘기를 그린 드라마다. 실제로 조선에는 노비를 잡기 위한 '추쇄도감'이라는 기관이 존재했다. (자료화면에서 캡쳐)
▲‘추노(推奴)’- 두 전란이 빚은 비극적인 인간사냥몇 해전 방영된 ‘추노’라는 드라마는 말 그대로 노예사냥꾼에 관한 얘기다. 단순히 노비 사냥이라는 이색적인 소재뿐 아니라, 이 드라마는 당시의 피비린내나는 치열한 정쟁과 복잡한 사회상을 아주 밀도있게 그려냈다.
임진왜란으로 잿더미가 된 조선의 임금이 된 것은 광해군이었다. 명나라의 도움으로 조선의 조정은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게 됐지만, 여진족(후금)의 나라는 명나라마저 집어 삼킬 태세였다.
적절한 등거리 외교를 펼친 광해군 시절, 조선은 그나마 불안한 평온을 유지했지만, 서인세력을 등에 업은 능양군(인조)의 반정으로 광해군은 옥좌에서 쫒겨 났다. 후금(청)을 오랑캐라 배척한 인조와 서인 세력의 어처구니없는 외교실책은 결국 병자호란이라는 엄청난 전란을 또 다시 불러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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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란과 호란, 두 차례의 전란은 조선의 신분질서를 흔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왜란때 장례원이 가장 먼저 불타오른 것은, 전담하는 관청이 있을 만큼 관리해야 할 노비의 숫자가 많았던 것과 동시에, 신분질서 유지가 그만큼 절실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전란을 거치면서 장례원이 불타고 도망친 노비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노동 즉 경제활동을 할 인구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하지만 삼전도의 굴욕을 당한 인조와 서인세력은 청에 대한 보복이 최우선이었다.
인조시절 북방으로 사민정책(徙民政策)을 시행한 것도 이같은 취지가 반영된 것이다. 당시의 국력으로는 이같은 시책을 실행에 옮기는 것이 쉽지 않았고, 인종의 뒤를 이은 효종 역시 북벌의 이념을 이어받았다. 8년간 청나라에 끌려가 볼모생활을 했던 효종으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인구의 감소와 흐트러진 노비관리는 ‘추노’(推奴)라는 정책으로 이어졌다. 신분제도의 재정립이라는 명분외에 군력확충이라는 속뜻도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도망친 노비는 무려 16만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노비는 비천한 신분이라는 이유로 군역이 면제됐는데, 군력확충 때문에 노비를 잡아들였다면, 노비는 처벌보다 오히려 양민으로 신분이 상승하는 예상치 못했던 결과가 빚어진 셈이다.
하지만, 효종대의 노비 추쇄사업은 만 8천명의 도망 노비를 잡아내는데 그쳤다.
창덕궁 인정전 내부. 조선말 순종때 서양식으로 개조되면서, 천장에는 전등이 설치됐고, 창틀에는 커튼이 드리워졌다. (자료제공=문화재청)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정치무대 인정전(仁政殿)인정전은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탄 이후 조선의 정궁 역할을 한 창덕궁의 정전이다. 경복궁의 근정전과 같은 역할을 했다고 보면 될 것 같다. 국보 225호다.
왕의 즉위식과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 접견등 주요한 국가적 의식이 치러졌다. 여러차례 화재로 수차례 중건과 보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특이한 것은 천정에 전등이 설치돼 있다는 점이다. 조선 마지막 황제였던 순종때 서양식으로 개조됐기 때문인데, 용마루에 오얏꽃무늬가 그려진 것도 이때쯤인 것으로 보인다.
영화 ‘왕의 남자’의 배경이었던 연산군 시절, 인정전은 실제 유희의 공간이 되기도 했다. 연산군은 남자 광대와 재주 있는 여자 10여명을 동원해 인정전 뜰에 대령하도록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공길을 빼앗긴 광대 장생이 외줄타기를 하다 하늘로 솟구치는 마지막 장면이 실제로 인정전 마당에서 펼쳐졌을 지 모를 일이다.
인정전은 인조 반정과 관련된 곳이기도 하다. 반정을 도모한 서인세력들은 훈련도감 대장 이홍립을 매수해 창덕궁의 돈화문을 열어 젖히고, 아무런 저항없이 궁궐을 접수했다.
이때 반정군의 실수로 떨어진 횃불이 화재로 이어지면서 창덕궁은 화재에 휩싸였지만, 용케도 인정전만 화마를 피했다.
1919년 8월 29일. 한일강제 병합조약이 맺어진 곳도 창덕궁 인정전이다. 어렵던 시절, 이승만 대통령은 인정전에서 미군부대의 휘발유를 빌려 불을 피운 뒤 외교파티를 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