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계기 이산가족상봉 행사가 열린 20일 오후 금강산호텔에서 치러진 단체상봉에 북측 가족들이 참석하고 있다. 이산가족 상봉행사가 열린 것은 지난 2010년 10월 이후 3년 4개월 만이다. (윤성호 기자)
검은 머리의 앳된 자매는 60년이 지나 백발의 노인이 돼서야 만났다. "반드시 누나를 찾으라"는 어머님의 유언을 가슴에 담고 만난 오누이도 있었다. 사진 여러 장은 물론이고 가계도까지 준비한 가족들도 보였다. 한 평생을 기다렸지만 해후는 찰나 같기에, 최대한 많은 것을 나누려는 것이다. 20일 남북 이산가족들이 만난 금강산 호텔 풍경이다.
#. 92살 아버지가 62살 아들에게 "늙었다"
25살이던 아내가 임신한 사실도 모른 채 남쪽으로 내려왔던 강능환(92) 할아버지는 이미 늙어버린 아들(강정국,62)의 얼굴을 보며 "늙었다"고 말하고 울었다. 60년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들이지만, 갸름한 얼굴이 당신을 꼭 닮았다. 운동을 좋아하고 술은 잘 마시지 못하는 것도 같다. 강 할아버지는 무심한 세월이 잊게 한 아내의 이름도 확인했다.
#. 여든 살 넘은 할아버지, 아이처럼 "엄마, 미안해"
정희경(80) 할아버지는 조카 정철균(70) 씨를 만나자마자 끌어안은 채 얘기를 나눴다. 정 할아버지는 "너랑 네 아버지를 (북쪽에) 두고 와서 미안하다"며 "83년 첫 상봉신청을 할때 아버지와 함께 북쪽의 어머니와 너를 찾으려고 신청하고 기다렸는데...(아버지가) 7년 전에 돌아가셨다"고 울었다. 정 할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신 어머니를 찾으며 아이처럼 "엄마, 미안해"를 연신 외쳤다.
이산의 세월이 꿈에도 그리던 가족의 기억을 흐릿하게 만든 경우도 있었다. 이영실 할머니(87)는 치매로 북쪽에 두고 온 동생 리정실(84) 씨의 얼굴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언니를 보며 리 씨는 "쉴 새 없이 눈물만 흘렸다" 보다못한 리정실 할머니의 딸이 "엄마, 이모야 이모. 바로 엄마 밑에 동생"이라며 어머니의 팔을 흔들었다. 리 할머니는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눈물을 흘렸다.
문정아 할머니(86)는 "나 막내 딸이잖아"라고 우는 북측 가족의 말을 듣고서야 손을 붙잡고 울기 시작했다. 상봉 상대라며 한 테이블에 앉긴 했는데, 처음에는 자리 배치가 잘못돼 다른 가족과 마주 서 있었던 까닭이다. 문 할머니는 북쪽의 두 자매를 딸에게 소개하며 "우리 세 자매가 닮았지?"라고 물었다.
북쪽의 누나 김명숙(68) 씨를 만난 김명복(66) 씨는 "어머니가 누님을 기다리다가 10년 전에 돌아가셨다"며 탄식했다. 함께 내려온 아버지 역시 돌아가시기 전에 "내가 죽더라도 네가 누나를 꼭 찾으라"고 했단다. 5식구 중 유일하게 북쪽에 남은 누나에게 김 씨는 이번 만남에 "꿈만 같다"며 자꾸 되뇌었다.
나목섭 할아버지(80)는 "30년 넘게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했는데, 이제라도 죽지 않고 보니 반갑다"며 조카의 손을 잡았다. 조카는 "아버지가 큰 아버지 생각에 눈도 제대로 못 감고 가셨다"고 안타까워했다.
설 계기 이산가족 상봉일인 20일 오전 강원도 속초 한화콘도에서 1차 상봉 대상자 장춘 할아버지(82)가 상봉장으로 향하는 버스에 타기 전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윤성호 기자)
#. "형이 고무신 사서 다시 오겠다고 했잖아"
북측의 동생 리철호(77) 씨는 귀가 잘 들리지 않는 형(이명호,81)을 위해 메모지를 꺼냈다. "어머니가 형이 고무신을 사서 다시 오겠다고 했다"는 64년 전 약속이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무심히 세월을 흘려보내야했던 이명호 할아버지는 건네 받은 부모님 사진에 "이렇게 귀한 것을!"이라고 감탄할 뿐이었다. 이창주 할머니(78)는 북쪽에 남기고 왔던 가족들로부터 "집 나가면 고생인데...도대체 어디까지 간거야"라는 울음 섞인 핀잔을 들어야 했다. 이렇게 멀고 긴 시간이 될 줄 그땐 알았을까.
#. "제가 기관사니까 열차타고 꼭 다시 올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