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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정권은 왜 전쟁통에 국민을 무차별 학살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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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연맹, 끝나지 않은 비극 ③] 역사학자 김민철 "광적인 '빨갱이' 낙인"

한반도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6·25전쟁. 66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남북 분단 상황에서 아픔의 깊이는 오히려 더해지고 있습니다. 그 짙은 그늘 아래 사람들의 손길을 간절히 기다리는 수많은 비극이 여전히 살아 숨쉬는 까닭이겠죠. 그 중 하나가 바로 '국민보도연맹' 사건입니다. 6·25전쟁 발발 당시 이승만 정권 주도로 셀 수 없이 많은 민간인이 학살 당했던 참극이죠. 25일, 6·25전쟁 66주기를 맞아 다시는 반복되지 말아야 할 뼈아픈 역사에 관한 증언을 전합니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6·25 터지자 경찰 손에 돌아가신 아버지…60년 뒤 이유 찾아"
② "탈영병과 성이 같단 이유로 형님은 국군에게 총살 당했다"
③ 이승만 정권은 왜 전쟁통에 국민을 무차별 학살했나


미국에서 공개된 6·25전쟁 당시 군경의 민간인 학살 현장(사진=온라인 커뮤니티 갈무리)

 

"국민보도연맹 학살 사건이 지금까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단순합니다. '빨갱이'라는 낙인, 주홍글씨의 힘이 여전히 막강하니까요. 그렇게 희생자, 피해자라는 말 자체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던 거죠."

민족문제연구소 김민철 책임연구원은 "한국의 지배계층에게 좌익, 그러니까 '빨갱이'는 사회에서 배제돼야 할 존재들"이라고 설명했다.

"정권이 바뀌는 과정에서도 보도연맹 사건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은 데는 그 희생자들이 (지배계층에게) 일차적으로 관심의 대상이 아니라는 데 있죠. 외면 받고 없어져야 할 존재들이라고 생각하니까요. 대표적으로 그분들의 상처가 컸던 때가 1960년 4·19혁명이었죠. 당시 유족회가 만들어져 활동을 했는데, 그해 벌어진 5·16쿠데타 이후 다시 모두 빨갱이가 돼 유족회 대표들이 감옥에 갔습니다. 그 트라우마의 크기가 엄청났던 거죠."

한국 근현대사에서 민간인 학살 등에 대한 지배계층의 책임 문제를 연구해 온 역사학자로서 김 연구원은 "언제나 그렇듯이 과거사 문제는 사회가 민주화될 때 제기된다"고 강조했다.

"반대로 사회가 거꾸로 흐르면 (과거사 문제는) 묻힙니다.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적을 만들어야 하잖아요. 외부의 적만 갖고는 안 되니 내부의 적을 만들어 공포감을 불러일으키고 자기 편을 단합시키는 거죠. 더욱이 해방 직후인 1945년부터 48년까지는 국가 건설을 두고 남과 북이 체제 경쟁을 벌이던 시기입니다. 그 경쟁이 죽느냐 사느냐 식의 극단적인 선택으로 치달으면서 전쟁으로 이어진 겁니다."

이렇듯 양 극단의 체제 경쟁 상황이 만들어지다보니 중간지대는 성립 될 수 없었으리라. "이러한 맥락에서 (당시 이승만 정권의 민간인 학살이 자행된 데는) '빨갱이는 죽여도 된다'는 전쟁의 광기를 낳고, 이를 합리화 시킨 면이 커 보인다"는 것이 김 연구원의 분석이다.

당시 학살에는 전국 경찰 병력이 총동원됐다. 그들은 지역에서 활동해 온 만큼 희생자들과도 안면이 깊었을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 자신들의 사촌, 이웃을 죽이는 끔찍한 일을 벌였을까.

"극단적인 상황에서 그러한 합리적인 판단들을 했을지는 의문입니다. 위에서 지시가 내려오면 기계적으로, 자기 합리화를 통해 판단했을 테니까요. 희생자들이 사촌, 한집 건너 이웃이었을 텐데, 해방 이후 마을 내 이념 갈등 등이 겹쳐지면서 그런 참사가 벌어진 겁니다."

민족문제연구소 김민철 책임연구원. 그는 "과거사 정리·극복을 위한 노력은 계속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진=유원정 기자/노컷뉴스)

 

그는 "당시 지역 내에서 민간인과 경찰 사이 갈등의 골은 매우 깊었다"고 설명했다.

"해방 뒤 한반도 이남에 미군정이 들어서면서 일제시대 친일 경찰들이 그대로 자리를 차지하게 되잖아요. 이러한 현상이 지방에서는 특히 심했습니다. 1946년 대구 10월 항쟁의 경우 '친일 경찰들이 돌아와 설치는 것을 도저히 못 보겠다'는 정서가 깔려 있었죠. 그런 점에서 당대 경찰들이 자기보호를 위해 소위 빨갱이들을 확대 재생산했던 겁니다. 친일의 과거로부터는 정통성을 가져올 수 없으니, 공산주의자들을 때려잡는 것이 대한민국을 건설하는 데 있어서 자신들의 사명이라고 스스로를 세뇌시킨 셈이죠"

김 연구원은 보도연맹 사건을 "한국 근현대사의 어두운 단면으로서 반드시 극복해야 할 문제"로 지목했다.

"근현대사를 연구하는 입장에서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국가와 개인의 권리·인권 문제가 역사 안에서 어떻게 만들어지고, 갈등을 빚는지도 제 연구 분야 가운데 하나죠. 이를 전체적으로 보면 결국 과거사 문제로 얽힙니다. 제가 연구해 온 한국 사회 지배계층의 책임 문제들을 비롯해 일제의 강제 동원 피해자들의 인권 문제 등은 해방 이후에도 오롯이 연결되니까요."

그는 "연구를 진행하면서 보도연맹과 같은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기가 정말 어렵다는 점을 절감한다"고 말했다.

"과거사 문제는 우리가 외면하고 싶은 사안 중 하나입니다. 현실이 너무나 힘드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근현대사의 아픈 상처를 어떤 식으로든 끌어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상처들이 지금까지 세월호 등 다양한 참사로 나타나고 있다고 봐요. 하지만 현재로서는 과거사 문제의 희생자들이 상처를 치유할 수 있도록 돕는 게 굉장히 비관적인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연구원은 "과거사 정리, 극복을 위한 노력은 계속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몇 년 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문을 닫은 뒤로 국가는 과거사 극복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어요. 노무현 정부 때 굉장히 많은 사회적 비용을 들여 과거사를 정리하려 했는데, 이게 끊어져 버린 거죠. 이를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가 가장 큰 고민입니다. 최근 들어 '현대사 안에서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들의 유골만이라도 발굴해 밝은 곳으로 모시는 것이 산 자들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덕적 책무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는 특히 "억울한 죽음을 애도하는 데는 이념이 따로 없다"고 강조했다.

"우리의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고통이 발생했고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지를 끊임없이 이야기해 주는 일은 중요합니다. 없었던 일로는 결코 덮어둘 수 없습니다. 이는 결국 현재의 한국 사회에게 던지는 질문, 곧 우리 자신을 위한 일이 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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