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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꿀과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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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5-0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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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중의의 가장자리 톡]

조중의 포항대학교 초빙교수·전직 언론인 제공조중의 포항대학교 초빙교수·전직 언론인 제공
내가 좋아하는 껌은 에덴동산에 살던 사람과 이름이 같다. '이브'다. 승용차 수납장에 껌이 떨어져 이브를 사러 편의점을 갔다. 진열된 껌들 사이에 아카시아가 보인다. 평소와 달리 '이브' 대신 '아카시아'를 집는다. 지난 주말부터 피기 시작한 아카시아꽃 때문이다.

껌을 입에 넣는다. 꽃향기와 달달한 꿀 냄새가 섞여 있다. 붕, 붕, 붕, 메아리처럼 울리던 벌꿀의 날갯짓이 들려온다.

아버지는 한 시절 벌을 쳤다. 내가 국민학교 5학년 때 시작해서, 40대 가장으로 살아갈 즈음 마쳤다. 처음 한 통의 꿀벌 상자를 마당에 갖다 놓고 취미로 시작한 벌치기였다. 그 한 통이 두통이 되고 두통이 열통으로 늘어났다.

주일에 예배를 드리는데 옆집 기봉이 엄마가 달려와 소리 지르는 일도 흔했다. "중의 아부지! 난리났씨유! 쏟아져 나왔써유!"

아버지는 허겁지겁 머리에 망사를 쓰고 긴 장갑을 낀다. 감나무 가지 끝에 매달린 수천 마리 황금 벌떼를 향해 올라간다. 한 손에는 물설탕을 잔뜩 바른 벌집이 들려 있다. 아버지는 수 천마리 벌들 가운데 숨어 있는 여왕벌을 찾는다. 모든 벌은 여왕벌을 따라오기 때문이다.  

성공이다! 아버지는 육각형의 기둥으로 만들어진 격자 공간의 벌집을 들고 내려온다. 새로운 여왕벌이 이끌고 나온 꿀벌 군단을 가만히 벌통에 넣는다. 꿀벌 한 통이 늘어난 거다.
 
아버지가 벌을 30여 년 칠 즈음에는 벌통이 100개가 넘었다. 그래서 나의 유년과 사춘기는 아버지의 벌치기와 궤도를 같이한다. 토성의 고리처럼.

5월은 채밀의 시간이다. 아카시아꿀을 뜨는 날은 잔칫날이다. 밀짚 모자를 쓰고 망사로 머리를 덮는다. 우주복 안에서 안도하는 우주인처럼 망사 안에서 행복하다. 채밀기에 벌집을 넣고 원심분리기를 돌리면 꿀이 쏟아져 나온다. 꿀 냄새가 너무 짙어서 몽롱해진다. 망사 안으로 들어온 벌에게 한방 쏘인 이마가 숯불처럼 달아오른다.

조중의 포항대학교 초빙교수·전직 언론인 제공조중의 포항대학교 초빙교수·전직 언론인 제공
아버지는 채밀한 아카시아꿀을 다락에 보관했다. 창고에 곡식을 쌓아두듯. 그걸로 필요한 생계비를 마련했다. 주문이 들어오면 다락에서 꿀병을 꺼내 정성껏 포장했다. 춥고 쓸쓸한 길고 긴 겨울, 다락방의 황금 꿀병은 줄어간다. 봄이 가까워질 즈음이면 그 많던 꿀병 자리가 텅 비어서 방과 후의 운동장 같다.

돌아보면 벌들이 만드는 '꿀'은 '꿈'이기도 했다. 아카시아꽃과 벌들이 펼치는 낭만과 풍요와 신비의 공간은 '꿀'이 '꿈'이 되는 신기루를 만드는 시간이었으니까.

다음날 팅팅 부어오른 빨간 이마와 눈두덩으로 등교를 한다. 그리고 방과 후에는 다시 아카시아꽃과 벌들의 요술을 보러 간다. 반죽처럼 부푼 빨간 이마에 주름이 생기도록 미소를 지으며……

편의점에서 좋아하는 이브를 못 본 척, 아카시아를 집은 것은 '꿀'과 '꿈' 때문이다. 아카시아 향기를 맡으면 붕붕대던 날갯짓을 들을 수 있을 거라는 마음으로…… 온몸을 휘감던 향기를 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호기심으로……

조중의 포항대학교 초빙교수·전직 언론인 제공조중의 포항대학교 초빙교수·전직 언론인 제공
시간이 흐르면서 지구는 뜨거워졌고, 새벽이슬처럼 빛나던 생물들이 하나둘 사라졌다. 아버지의 벌 치는 일도 70살 되던 해 멈췄다. 아버지가 어느 날 벌통 앞에 앉아 혼잣말처럼 하던 말이 잊히지 않는다. "누군가가 벌을 데려가는구나. 꿈도 벌을 따라가나 보다"

이제 아카시아꽃에는 그 많던 벌들이 없다. 붕붕거리는 날갯짓은 환청 속에서만 맴돈다. 그 많던 꿀벌은 누가 데리고 간 걸까? 공중에서 춤추던 아카시아꽃 향기는 편의점에 갇혀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꿀'에서 피어나는 '꿈'이 사라지지 않았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기억에서 지워진 줄 알았던 1980년대 인기 CM송을 떠올리며 흥얼대다니!

"아름다운 아가씨. 어찌 그리 예쁜가요.
그 향기는 뭔가요. 아아아아아- 아카시아…. "

아카시아꽃이 피는 5월은 행복과 심란이 동거한다. 그때마다 '꿀'이 '꿈'으로 변모하는 비밀을 맛보려고 편의점 앞에 서 있는 나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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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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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OOGLEjjjsm2025-05-07 17:59:27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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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의도 없는 사람 본인보다 어린 사람 마음에 칼 꼽고 감성글이라니 대단하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