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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두 행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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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1-18 0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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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중의의 가장자리톡]

조중의 포항대학교 초빙교수·전직 언론인 제공조중의 포항대학교 초빙교수·전직 언론인 제공
늦은 오후에는 연못물이 신비하게 반짝인다. 하루의 중력을 거슬러 오르던 분수는 이때부터 금물결로 빛난다.

이 연못에는 늙은 거위가 산다. 지금은 '살았었다'고 해야 맞다. 유일한 행성이었으며 따뜻한 집이었으며 삶의 터전이었던 연못. 그곳에 살던 거위가 얼마 전 죽은 거니까.

그가 살아 있을 때는 이런 일이 흔했다. 연못 가장자리 풀밭에 올라와 늦가을 볕을 쬐고 있던 거위에게 묻는다.

"넌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니? 나를 안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인데, 너에게 나는 무슨 의미일까?"

거위가 나를 쳐다본다. 뾰족한 살구색 부리와 쥐눈이콩 같은 검은 눈으로 사유의 파동이 흐른다. 귀를 기울이면 더욱 명료하다. 거위지만 애착할 줄 알고 때로는 외로움도 탄다. 연못 주변을 걸을 때면 저만큼 떨어져 있는 거위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거위의 대답은 어디까지나 나의 듣는 심장에서 작용하는 차원이니까. 누가 그걸 무시하거나 이상하다고 해도 당연하다. 거위와 나와의 일이니까.

"네가 오래 보이지 않으면 궁금해지는 게 의미랄까. 길들여졌으니 당연히 책임도 져야 한다는 존재감이기도 해. 종(種)이 달라서 언어로의 소통이 불가능하지만 말보다 깊은 영혼이 있으니까. 그런 네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이 의미지."

거위는 만만찮은 추론으로 나를 놀라게 한 뒤 날개를 펼친다. 한차례 퍼덕이고 나서 반짝이는 수면에 농구공처럼 몸을 띄운다. 둥둥 떠가며 자유하는 물 위의 생명은 내 마음을 끌어당긴다. 나는 맑은 웃음으로 거위를 기분 좋게 해주고는 연못 옆에 있는 아파트로 간다.

조중의 포항대학교 초빙교수·전직 언론인 제공조중의 포항대학교 초빙교수·전직 언론인 제공
어느 주말 해가 질 무렵 연못가의 작은 호텔을 찾아갔다. 카운터에 있는 젊은 남자에게로 다가가 물었다.

"연못에 살던 거위 있잖아요? (손가락으로 창 너머 연못을 가리키며) 그 거위가 안 보이네요. 혹시 어디로 갔는지 아는 분이 있나 해서요."

나는 연못 건너 아파트에 사는 주민이며 이곳의 거위와 함께 지내 온 세월이 10년이 넘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남자는 그제야 경계를 푼다.

"거위가 앞을 보지 못했대요."
"눈이 멀었어요?"
"그러니 먹을 수 없잖아요. 보여야 먹지요. 늙은 데다가 병까지 들었나 봐요."

눈먼 거위라니. 조마조마하며 묻는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그 거위……"
"죽었대요."

거위가 죽고 나서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아졌다. 거위를 통해 바깥으로 투사했던 꿈과 욕망이 사라졌다. 거위 때문에 피어나던 상상의 갈래는 혹서기의 나무줄기만큼이나 다채로웠는데……

죽은 거위와의 관계는 오묘했다. 거위는 내가 고립됐다는 것을 인지할 때나 심리적인 위기로 흔들릴 때 마음을 열게 했다. 자기는 언제나 연못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게 했다.  

집을 떠나 낯선 도시에 머물 때도 '거위는 언제나 그곳에 있다'는 믿음으로 나를 안심하게 하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병원에 입원해 고투하다가 마음이 옅어졌을 때, 기진맥진해서 병실 복도를 걸을 때, '거위는 지금 연못에 있다'는 믿음으로 코의 생기가 살아나는 이적이 어디 있을까.

집으로 돌아오면 먼저 연못으로 나가 거위에게로 간다. 그는 나를 안다. 소란스럽게 소리 내며 풀밭으로 올라온다.

"넌 어땠니?"
내가 거위의 안부를 묻지만 거위는 내가 힘들었다는 것을 안다.
"늘 똑같지 뭐. 얼굴이 할쑥한 걸 보니 많이 아팠나 보네"
"아무튼 고마워. 이곳에 네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니까. 진심으로……"

고맙다는 마음을 전하고 나면 거위는 나에게 장황할 만큼 철학적인 이해를 전하려 애쓴다.

"애착이 아니길 바래. 서로에게 위로가 된다면 서로가 행운아인 거야. 서로에게 같은 믿음이 생긴다는 건 놀라운 일이지. 난 너희에 대해 잘 몰라. 하지만 나에게 마음을 주는 존재는 햇볕을 쬘 때처럼 따뜻함이 느껴지지. 넌 햇빛과 같아. 내게 각인된 존재지."

조중의 포항대학교 초빙교수·전직 언론인 제공조중의 포항대학교 초빙교수·전직 언론인 제공
 그날 밤은 행복했다.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죽은 거위를 애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스마트폰에 보관하고 있는 거위의 사진을 불러내 책상 위에 세운다. 베란다에서 흰 제라늄꽃 한 송이를 꺾어와 사진 앞에 올린다.

"잘 지내고 있지? 너와 연결되어 있던 날들의 나는 행운아였어. 너에게 나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려주려고 애쓰던 너도 행운아였어. 우린 연결되었으니까. 고마워."

거위는 죽어서도 여전히 자신의 철학적 궁리를 뽐낸다.

"너의 마음속에 파묻히려는 투명함을 캐내도록 상상해봐. 그러면 네 안에 내가 있을 거야. 언제나 어디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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