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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반도체·밥을 짓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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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굴뚝신문]
소설가 정보라의 고공농성 연대기

'굴뚝신문' 발행위원회 제공'굴뚝신문' 발행위원회 제공"우리 노동자들은 일해서 거대한 기계부터 아이들의 장난감까지 모든 것을 만드는 사람들이고 우리 자신의 인간적 존엄성을 위해 싸울 권리를 빼앗긴 사람들입니다. 모두가 우리를 자기 목적을 이루는 도구로 만들려 하고, 또 그렇게 만들어버립니다. 우리는 이제 모든 권력과 차츰차츰 싸울 기회를 얻을 정도의 자유를 원합니다. (중략) 아시겠습니까, 우리는 폭도가 아닙니다."

1906년도 러시아 소설 『어머니』(막심 고리키 저)의 주인공 파벨 블라소프가 재판정에서 스스로 최후변론하는 대사다.

김형수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장은 거대한 기계, 즉 배를 만드는 사람이다. 박정혜 한국옵티칼하이테크지회 수석부지회장은 얇고도 섬세한 편광필름을 만드는 사람이다. 고진수 세종호텔지부장은 여행객들에게 밥을 먹여주는 사람이다. 이들의 노동으로, 우리의 노동으로 세상이 돌아간다.

공장에 생수 보내기 운동


한국옵티칼하이테크에 나는 2022년 11월에 처음 가 본 것으로 기억한다. 남아 있던 조합원 17명이 공장에서 기자회견을 하던 날이었다. 구미공장은 산업단지 한가운데 있었다. 전기는 조합원들이 한전과 협상해서 다시 연결할 수 있었다. 다만 수도는 연결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후에 옵티칼 공장에 생수 보내기 연대가 시작되었다. 연대해주시는 분 중에서 농업용수를 직접 싣고 정기적으로 공장에 와서 물탱크에 부어주고 가시는 고마운 동지도 계셨다.

2024년 1월 8일 구미시에서 공장철거 승인을 했고, 박정혜와 소현숙이 공장 옥상에 올라갔다. 당시 사진이 내 휴대폰에 남아 있다. "모두의 생존을 위한 깃발이 되어"라는 현수막이 건물에 세로로 드리워져 있고 두 사람은 그 절박한 현수막 위에 손가락 끝 한 마디 정도로 조그맣게 보인다.

2024년 2월 16일, 구미시가 철거반을 몰고 공장에 찾아왔다. 전날 전국에서 찾아온 연대 동지들이 공장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다음날 조합원들이 공장 입구에 망루를 설치하고 올라가 차례로 앉아서 쇠사슬로 몸을 감쌌다.

2월 16일에 철거반이 처음 온 것은 아니었다. 공장폐쇄 결정 이후로 옵티칼 사장은 일본 본사의 하수인이자 '청산인'이 되었다. 사장이 철거반을 끌고 매일같이 몰려와서 농성하는 조합원들과 싸움을 벌였다. 쪼잔하게 공장 울타리를 하나씩 망가뜨리기도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철거반은 물러났고 우리는 공장을 지켜냈다. 그러나 나는 너무 무서웠다. 망루가 너무 아슬아슬해 보였고 그 위에 쇠사슬로 몸을 묶고 앉아 있는 동지들이 눈물 나게 안타까웠다. 그래서 나는 망루 바로 아래에 섰다. 혹시나 상황이 나빠져서 망루가 만에 하나라도 무너지면 동지들 아래에 깔릴 생각이었다. 그때 내 앞에 김형수 지회장이 있었다. 김형수는 나를 기억 못 하지만 나는 기억한다. 2022년 대우조선해양 노조가 파업했을 때 연대하러 갔었다.

망루에 올라 쇠사슬을 묶고 강제 철거에 맞서던 날


고공농성 이후 날씨는 우리를 전혀 도와주지 않았다. 천막을 치자마자 눈비와 바람이 몰아쳤다. 여름이 오자마자 옥상은 불덩이처럼 달아올랐다. 박정혜, 소현숙 두 동지는 체감온도 40도가 넘는 공장 옥상 위에서 미적지근한 생수통을 안고 길고 괴로운 날들을 버텨냈다.

2024년 11월 22일 김진숙·박문진 지도위원이 부산 호포역에서 출발해 11월 30일에 옵티칼 공장에 도착했다. 고공농성 320일째였다. 며칠 후 12월 3일, 윤석열이 내란을 일으켰다. 민주노총 경북본부 간부들은 가장 먼저 구미 옵티칼 공장으로 달려갔다.

이후 내란수괴가 파면될 때까지 넉 달 동안 나는 불안에 시달렸다. 박정혜·소현숙 동지가 경북지역 활동가들에게 가장 '아픈 손가락'이라는 사실, 우리가 가장 먼저 보호하고 가장 마지막까지 지키고 싶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내란 세력이 알게 될까 봐 무서웠다. 한밤중에 내란이 일어났기 때문에 이후로 나는 혹시나 밤중에 군인들이 공장에 나타나는 건 아닐지 문득문득 소름이 끼치곤 했다.

2025년 1월 10일, 전국 각지에서 1인용 텐트와 침낭을 들고 구미 옵티칼 공장에 찾아와 1박 2일 '희망텐트' 행사를 했다. 2월 7일, 김진숙·박문진 동지가 구미에서 서울 국회까지 걷는 '희망뚜벅이'를 시작했다.

나는 2월 7일 출발 첫날 옵티칼에서 함께 출발했다. 이날도 눈보라가 몰아쳤다. 걷는 거리는 한 달 일정 중에서 가장 짧은 12킬로미터였는데 정말 고역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눈이 점점 더 많이 내렸다. 공원에서 휴식하며 점심을 먹었는데 김밥과 주먹밥이 반쯤 얼었다. 그래도 구미역에서 우리는 웃으면서 "투쟁"을 외치고 첫날 행진을 마쳤다.

일주일 뒤인 2월 13일, 고진수 세종호텔지부장이 고공농성을 시작했다. 3월 1일, 희망뚜벅이 행진단이 서울에 진입했다. 국회 앞에서 짧게 기자회견을 하고 명동으로 향했다. 옵티칼 조합원들이 "고진수 동지 우리 왔어요" 하고 인사하며 눈물을 흘렸다. 광화문 광장 마무리 집회에서 김진숙 지도위원이 무대에 올라 "소현숙, 박정혜가 아직 고공에 있고, 세종호텔 고진수도 고공에 있고…" 하는 부분에서 우리는 모두 울었다.

3월 15일,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 김형수 지회장이 30미터 철탑 위에 올라 고공농성을 시작했다. 4월27일, 소현숙 동지는 건강이 심하게 악화되어 476일만에 땅으로 내려와야 했다. 2024년 한 해 동안 니토옵티칼은 평택 공장에서 87명을 신규 채용했다. 구미에서 한국옵티칼하이테크 조합원 7명은 고용승계와 먹튀 외국투자자본 규제를 외치며 투쟁 중이다. 박정혜 동지는 아직도 옥상 위에 있다. 고진수 동지도, 김형수 동지도.

희망텐트와 희망뚜벅이


고진수 동지는 2017년 4월 14일 6개 장기투쟁 사업장 노동자들과 광화문 광장 건너편 건물 옥상 광고판 위에 올라갔다. 이들은 "정리해고, 비정규직, 노동악법 철폐! 노동법 전면재개정! 노동3권 완전 쟁취!"라고 쓴 노란 현수막을 늘어뜨렸다. 그 옆에 검은 바탕에 노란 글씨로 "세월호 진실규명"이라는, 작지만 눈에 확 띄는 현수막도 있었다.

나는 그때 세월호 농성장 서명지기였고, 비정규직 대학 강사였다. 고공농성도 무서운데 고공에서 단식농성을 하려고 나와 같은 비정규직 노동자, 해고노동자들이 건물 옥상에 올라갔다는 게 너무 서러워서 울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세월호 진실규명" 현수막을 걸어준 게 너무 고마워서 울었다. 그때는 고진수 동지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고진수를 부당해고한 세종호텔은 학교법인 대양학원, 세종대학교를 소유한 그 법인에서 수익사업으로 운영한다. 나는 세종국민학교를 졸업했다. 세종대와 같은 법인이고, 그때는 초등학교-중학교-대학교가 같은 부지 안에 함께 있었다. 80년대에 거리에 나온 다른 대학생들이 "독재 타도"를 외칠 때 세종대 학생들은 "족벌재단 물러가라"를 외쳤다. 이 구호를 얼마나 자주 들었는지 나는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초등학교 교실까지 몰려오던 최루가스 냄새도 기억하고 있다. 도저히 수업을 할 수가 없어서 창문을 전부 닫고 학년 전체가 지하실로 피난했던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캠퍼스 안으로 경찰이 진입한 것이다. 학교가 학생들을 보호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 재단 이사장의 아들이 이제 세종호텔 운영의 전권을 쥐고 있다. 이런 사람들이 노동자를 어떻게 대했을지는 뻔하다.

고진수 동지가 다시 한번 고공에 오르게 되었다. 고공농성은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노동자의 마지막 선택이다.

세종호텔 세종대학 세종국민학교


김형수 지회장은 SNS에 매일 고공농성 일지를 쓴다. "나의 조선소 이야기"에는 먼 외국에 가서 다른 나라 노동자들과 함께 배를 만든 이야기도 상세하게 적고 있어 무척 재미있다. 빨리 이겨서 내려와 책으로 내면 좋겠다.

김형수 지회장이 고공에 오르게 된 이유로 여러 언론이 '상여금 인상'을 언급했는데 그 실상을 들여다보면 상여금의 문제가 아니라 비정규직 하청노동자의 생존권을 보장하라는 것이다. 조선업은 전체 노동자 중 하청노동자 비율이 60%가 넘는다. 게다가 하청노동자가 기계 설치, 판금, 용접 등의 핵심 사업을 맡고 있다. 김형수도 용접 노동자다. 그런데 조선업 하청노동자의 임금은 정규직의 50-70퍼센트 수준이다. 그것도 원청이 기성금을 줄이고 있어서 하청업체가 도산하고 하청노동자는 임금을 못 받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나도 평생 비정규직이었다. 그리고 나도 고등교육의 핵심 업무를 맡았다. 전공 수업과 어학 수업, 신입생 대상 기초 수업부터 대학원까지 모든 수준의 수업을 두루 진행했다. 수업에 관련된 학과 회의에 참여하고 회의록을 작성하는 등 행정업무도 하고, 학생들의 질문에 대답하고 진로상담, 유학상담, 추천서 써 주는 일도 했다. 퇴직금 소송을 시작하니 여기저기 법원 판결문에서 "강사는 교수와 달리 학생 진로상담과 학과 행정을 하지 않기 때문에 정규직 교수만큼 일하지 않는다"고 판시한 것을 보고 어이가 없었다. 이 말은 사실이 아니다. 비정규직 강사는 정규직 교수와 똑같은 일을 한다. 정규직 교수보다 더 많은 일을 떠맡는다.

그러면서 대학 강사가 일 년에 버는 돈은 정규직 교수 연봉의 10~50퍼센트 정도 된다. 연세대 기준으로 내 강사 임금은 교수 임금의 10~20퍼센트 수준이었다. 시간당 받는 강의료는 12년 동안 3천원 인상되었다. 그리고2019년에 강사법이 시행되기 전까지 나는 3월에 개강하면 고용되어 6월에 종강하면 해고되고, 9월에 개강하면 다시 고용되어 12월에 종강하면 해고되기를 반복했다. 1년에 5개월인 방학 중에는 월급 받을 길이 없었다. 방학이 끝나가는 2월과 8월을 강사들은 '보릿고개'라고 쓴웃음을 담아 말했다.

물론 대학강사는 조선하청노동자처럼 위험한 일을 하지 않는다. 대학강사의 가장 큰 산업재해라고 해 봤자 두통이나 오십견 정도다. 배를 만드는 하청노동자는 언제나 죽음의 위협을 마주한다. 김형수 동지는 SNS에 배 아래쪽에서 불이 나서 그대로 갇혀 죽음을 맞이한 용접노동자 화재 상황을 다른 노동자들에게 알리고 대피시키는 업무를 맡아 배 안쪽까지 들어가서 150여 명을 대피시키고 자신은 대피하지 못해 목숨을 잃은 노동자의 이야기를 썼다.

배에 갇혀 죽은 용접공 이야기


한화오션 본사 앞에 농성장을 차린 뒤에 연대하는 동지들이 '무지개 조선소'라는 이름으로 모여서 배 모형을 만들었다. 하청노동자는 배가 완성되어도 진수식에 부르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연대하는 동지들은 함께 배를 만들어 진수식을 했다.

연대 동지 한 명이 '무지개 조선소' 스티커를 만들어 배부했다. 나도 이 스티커를 얻어서 박정혜를 위한 '투쟁인형'을 만들 때 사용했다. 고공농성 500일을 앞둔 박정혜 동지가 외롭지 않도록 인형동지 500개를 모으고 있다. 나는 해양 폐플라스틱을 재활용한 범고래 인형에 대구퀴어문화축제에서 얻은 "연대하면 승리할 수 있어요"라고 적힌 트랜스젠더 색깔 삼색 띠를 두르고 무지개조선소 스티커로 장식한 "단결투쟁" "고용승계" 피켓을 얹었다. 범고래는 상어도 잡아먹을 정도로 싸움을 잘한다고 한다. 최근 유럽에서 범고래가 억만장자들의 요트를 공격해서 뒤집는 사건이 자주 일어나서 유명해졌다. 자본가와 싸워 뒤집어버리는 범고래 최고다.

우리는 거대한 기계부터 장난감까지 우리의 노동으로 모든 것을 만드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도구가 아니다. 노동이 존중받고 노동자의 생존권이 존중받고, 일하는 사람이 자신의 노동으로 최소한의 존엄한 삶을 유지할 권리를 원한다. 이 당연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박정혜 고진수 김형수 동지가 고공에 올라 외치고 있다.

세상은 들어라. 우리는 싸운다. 그리고 연대하여 이길 것이다.

고공의 동지들이 승리할 것을 믿으며, 하루 빨리 내려오기를 희망한다.

나는 언제나 연대하며 더 이상 아무도 고공에 올라갈 필요가 없는 세상을 함께 만들 것이다. 투쟁.

*이 칼럼은 한국옵티칼하이테크 박정혜 여성노동자의 고공농성 500일, 세종호텔 고진수 98일, 한화오션 김형수 68일을 맞아 제작된 <굴뚝신문>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굴뚝신문> 제작에는 고공농성 해결을 촉구하는 14개 언론사 현직 노동기자들과 사진작가, 교수, 노동운동가들이 참여했습니다. ☞ <굴뚝신문> 구매 https://url.kr/wlcun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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