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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반구대는 귀신고래의 꿈을 꾸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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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요약

종적 감춘 반구대 암각화의 고래들
세계유산 등재 다음날, 부산에 향유고래 새끼 출현
반구대 귀신고래, 다시 장생포로 돌아올까

세계유산에 등재된 반구대 주암면의 암각화 도면. 울산시 제공세계유산에 등재된 반구대 주암면의 암각화 도면. 울산시 제공
오늘은 제일 날쌘 배를 골랐다. 날랜 노잡이들도 넉넉히 태웠다. 귀신처럼 달아나는 녀석을 잡으려면 이 정도 준비는 해야 한다. 신경이 한껏 곤두서고 팔뚝의 힘줄은 터질 듯 팽팽해진다. 작살이 제대로 날아간다. 오늘따라 해체수의 손놀림도 여느 때와 다르다. 
 
7천 년 전 어느 날 울산 장생포 앞바다에서 벌어진 장면이다. 이는 최근 '천전리 암각화'(국보 제147호)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반구대 암각화'(국보 제285호)에 생생히 담겨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포경(捕鯨.고래잡이) 그림이다.
 
반구대 암각화는 1971년 12월24일 울산 태화강 상류 지천인 반구천 절벽에서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발견됐다. 너비 8m, 높이 4.5m의 중심 면과 주변 10여 곳에 동물과 사냥 모습 등 총 312점의 그림이 새겨져 있다. 대상이 파악되는 그림은 육지 동물이 108점, 바다 동물 69점, 사람과 사냥 도구는 38점이다.
 
무엇보다 가장 주목받는 그림은 역시 고래다. 50마리가 넘는데 귀신고래, 북방긴수염고래, 향고래, 혹등고래, 범고래, 큰고래, 돌고래 등 7종을 식별할 수 있을 만큼 세밀한 묘사가 감탄을 자아낸다.
 
새끼를 업거나 밴 어미, 헤엄치고 점프하고 물을 뿜고. 고래의 생태적 특징을 예리한 관찰력으로 정확하게 포착했다. 그 다채로운 구성과 섬세한 표현은 한반도 선사인의 예술적 수준까지 가늠하게 해준다.
 
고래사냥 장면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배를 타고 나가서, 작살을 던지고, 작살에 맞은 고래가 몸부림치고, 잡은 고래를 해체하는 모습 등 전 과정을 담아냈다. 심지어 요즘처럼 고래를 14등분으로 해체한 그림은 놀라움을 더한다. 고래잡이가 신석기시대부터 성행했고 울산 앞바다에 상당한 수의 고래가 살고 있었음을 증거한다.
 
반구천에서 배를 띄우고 태화강을 따라 백리(40km)를 흘러가면 장생포 앞바다가 펼쳐진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바로 그곳이다. 그래서 경해(鯨海), 고래의 바다로 불리었다. 암컷 고래가 새끼를 낳은 후 미역을 먹는 것을 본 고구려 여자들이 출산 후 미역국을 끓여먹기 시작했다는 설이 있을 만큼 예로부터 고래는 한국인에게 친밀한 존재였다.
 
자연스레 장생포는 포경 산업의 거점이 됐다. 19세기 일본과 미국 등의 포경업자들은 '사면팔방에 무수히 많은 고래', '배가 고래 등 위로 올라갔다'라고 일지를 남겼다. 한국인의 첫 고래잡이는 1946년 4월16일(한국포경기념일) 시작돼 70년대까지 호황을 누렸다. '울산 군수보다 고랫배 포수', '개도 만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닌다'는 말이 돌던 시절이다.
 
하지만 무분별한 남획으로 고래가 점점 사라져가자, 1986년 국제포경위원회(IWC)는 고래 보호를 위해 상업포경 금지 조치를 내렸다. 한국의 고래잡이도 막을 내렸다. 
 
2018년 해양수산부가 2월의 해양생물로 선정한 귀신고래2018년 해양수산부가 2월의 해양생물로 선정한 귀신고래
반구대 암각화의 주인공은 한국계 귀신고래이다. 수심이 50m 이하인 연안을 따라 해저를 훑으면서 먹이를 섭취하는 회색 수염고래이다. 길게는 60년을 살면서 길이 15m, 무게 40t까지 자란다. 길쭉한 머리를 해안 바위 사이에 세우고 있다가 사람이 접근하면 순식간에 '귀신'같이 사라진다. 번식을 위해 울산을 거쳐 사할린과 남중국해를 오가는 북서태평양계인데, 1912년 미국인 연구자 앤드루스가 한국계 귀신고래로 이름 붙였다.
 
1911년부터 1964년까지 1천338마리나 포획되면서 1972년 멸종한 것으로 보고됐으나 다행히 1993년 사할린 연안에서 130여 마리가 다시 발견됐다. 하지만 울산 등 동해로는 50년이 다 돼가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다. 발견시 1천만 원의 현상금까지 내걸었지만 감감 무소식이다.
 
그런데 반구천 암각화(반구대+천전리)가 세계유산에 등재된 다음날(13일) 부산 기장군 대변항에 어린 향고래 한 마리가 출현했다. 허만 멜빌의 소설 '모비딕'에 나오는 고래인데 반구대 암각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세계유산이 된 만큼 예전처럼 모두 모여 장생포 앞바다를 다시 '고래 바다'로 만들어주기를 소망한다.
 
포경기지였던 장생포는 2008년 고래문화특구로 지정됐다. 지난해에는 처음으로 방문객 150만명을 돌파했다. 고래생태투어 규모는 세계적으로 10억 달러(1조4천억 원)에 이른다.
 
지난 13일 부산 연화리 대변항에 나타난 새끼 향고래. 울산해양경찰서 제공지난 13일 부산 연화리 대변항에 나타난 새끼 향고래. 울산해양경찰서 제공
한반도 사람들은 이제 고래 사냥이 아니라 공존을 꿈꾸며 고래바다여행선에 오른다. 고래는커녕 돌고래를 보는 것도 하늘의 별따기이지만 오늘도 사람들은 배를 탄다.
 
52헤르츠의 외롭고 구슬픈 울음소리를 내며 여전히 동해의 심연을 헤매고 있다면, 이제 장생포 앞바다로 다시 올라와 신화처럼 숨을 쉬며 희푸른 물줄기를 힘차게 쏘아 올려 주기를, 7천 년 전 그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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