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연합뉴스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전문직 비자인 H-1B 수수료를 1인당 10만 달러(한화 약 1억 4천만 원)로 100배 인상하겠다고 발표하면서 미국에서 취업을 준비하는 한인들이 크게 동요하고 있다. 미국에 체류하며 취업하는 외국인들에게 가장 흔하게 통용되는 H-1B가 '하늘의 별 따기'처럼 취득이 어려워지면서 미국 현지 취업준비생과 직장인들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취득 시 1억 4천만 원 내야…"날벼락 같은 뉴스"
연합뉴스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19일 H-1B 수수료를 10만 달러로 올리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은 같은 날 포고문 서명식에서 "회사는 정부에 10만 달러를 지급할 만큼 외국인 피고용자에게 가치가 있는지 결정해야 한다"며 "대통령의 입장은 분명하다. 미국을 위해 가치 있는 사람만 받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 같은 조치로 미국 기업들은 앞으로 한인 유학생 등 외국인을 고용하려면 비자 비용으로만 10만 달러를 지급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사실상 외국인들의 취업을 막아버린 조치라는 평가가 나오면서 미국 현지 한인들은 크게 동요하고 있다. 미국 버클리대학교에서 디자인공학을 전공하고 있는 유학생 장혁진(29, 가명)씨는 "날벼락 같은 뉴스가 나왔다"며 "12월 졸업 예정이라 당장 취업을 준비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다"고 토로했다. 그는 "AI의 성장으로 인해 취업 시장 자체도 비관적이었는데, H-1B 비자 때문에 더 힘들어질 것 같다"고 걱정했다.
그래도 장씨는 그나마 상황이 나은 편이라고 한다. 장씨처럼 과학(Science)·기술(Technology)·엔지니어링(Engineering)·수학(Math), 이른바 'STEM' 전공자들에게는 유학생 비자를 2년 더 연장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지기 때문에 남들보다 조금 더 많은 시간을 벌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취업에 앞서 인턴십 경험을 하기도 매우 어려운 게 현실"이라며 "근데 이번에 H-1B 수수료 인상 발표로 인해 취업이 더더욱 어려워질 것 같아 주변에서도 다들 힘들어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금융업에 종사하는 박예인(26, 가명)씨는 지난 3월 H-1B 취득자로 선정됐다. '로또'에 당첨된 것처럼 기뻤던 그의 마음은 이번 수수료 인상 발표로 한순간에 덜컥 내려앉았다고 한다. 박씨는 "비자를 발급받을 수 있는 기한이 올해가 마지막이어서 정말 간절했었다"며 "며칠 뒤 10월 1일부터 비자가 발급되기로 예정돼 있는데, 10만 달러 얘기를 듣고 '말이 안 되는 상황'이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고 전했다.
이어 "이미 당첨된 사람은 수수료 인상 방침에 적용이 되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을 쓸어내렸다"면서도 "안심할 수는 없다. 또 언제 지침이 변경될지 모른다"고 트럼프 행정부의 변칙적인 정책을 우려했다. 그러면서 "H-1B는 (취득자들에게) 자유롭게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나설 수 있는 기회를 주는 비자인데, 앞으로는 미국 회사들이 H-1B를 보유한 외국인들을 채용하는 일에 주저할까 봐 염려스럽다"고 말했다. 한인들을 위해 10만 달러씩 수수료를 내줄 회사가 많지 않을 것이라는 게 뻔하기 때문에 채용 역시 어려워질 것이란 걱정이다.
이처럼 H-1B 비자 수수료 인상으로 영향을 받는 것은 개인뿐만이 아니다. 인상된 수수료 10만 달러는 모두 기업에서 부담해야 하기에 해외 인재를 영입하며 성장해 온 미국 기업들도 동요하기는 마찬가지다.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아마존 등 유명 IT 기업들은 지난 19일 트럼프 행정부의 수수료 인상 발표 직후 외국인 직원들에게 해외로 나가지 말라고 명령하고, 해외에 있는 직원들도 미국으로 돌아오라고 지시했다. 지난해 10월부터 지난 6월까지 기업별 H-1B 비자를 발급받은 외국인 직원 수는 아마존 1만 44명, 마이크로소프트 5189명, 구글 4181명이다.
韓유학생 4만 3129명 '패닉'…"다른 비자는 조건 까다로워"
서울 종로구 주한미국대사관에서 미국 비자를 발급받으려는 시민들이 줄을 서고 있다. 연합뉴스H-1B 비자는 미국에서 취업해 체류하는 외국인들에게 필수적인 비자로 통용된다. 미국에 체류하기 위한 방법은 다양하지만, 특별한 조건을 충족하지 않는다면 H-1B를 받는 것이 미국에 오래 체류하는 정공법으로 알려져 있다.
기본 3년에 3년을 추가로 연장할 수 있어, 6년간 시민권이나 영주권 취득을 준비하는 등 시간을 벌 수 있다. 또 대부분 H-1B 취득이 시민권과 영주권 등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미국 기업들도 H-1B를 보유한 외국인들을 선호한다고 한다.
H-1B를 취득하기 위해서는 매년 진행되는 추첨에 당첨돼야 한다. 신규 발급 건수는 매년 8만 5천 건으로 한정돼 있다. 회계연도 기준 다음 해 발급 대상을 결정하는 지난 3월 추첨에서는 34만여 명이 지원해 약 4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지난 2023년 이뤄진 추첨에는 무려 75만 8천여 명이 지원해 약 9대 1의 경쟁률까지 나타나기도 했다.
매년 정해진 선발 인원보다 지원자 수가 많아 H-1B 비자는 한인들 사이 '로또'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이번 트럼프 행정부의 수수료 100배 인상으로 상황이 변했다. 장씨처럼 H-1B 수수료 인상으로 미래에 영향을 받을 한국인 유학생들은 수만 명에 달한다. 미국 국제교육원(IIE)에 따르면, 2023~2024년 미국에 체류 중인 한국인 유학생 수는 4만 3129명이다. 그리고 미국 이민국(USCIS) 등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인 H-1B 발급 건수(신규·연장·변경 포함)는 3983건이다. H-1B 보유자들도 불확실한 비자 정책에 속을 태우고 있다.
장씨는 "H-1B를 받지 못하게 된다면 다른 쪽의 비자들을 알아봐야 할 것 같다"며 "다른 비자들은 (발급) 기준이 좀 까다롭기 때문에 다른 비자를 받을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H-1B를 취득 못 하면 대기업들은 영국 지사나 캐나다 지사로 파견을 보내주기도 한다는데, 이는 해외에 지사를 두고 있을 만큼 큰 기업들에 취직해야 가능한 상황"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심지어 미국 시민권자나 영주권자와 결혼이라도 해야 하나 싶은데, 이걸 대안이라고 떠올리는 것도 우습다"고 말했다.
"개인이 대응할 수 없는 문제…인재 끌어올 기회"
명지대학교 국제통상학과 김태황 교수는 "지금처럼 유학생들이 곤란해졌을 때 다른 대안이 생기면 그쪽을 선택하기 쉽기 때문에 미국에 대한 매력도는 약화된다"며 "중장기적으로 보면 미국에 건너가는 전문 인력들, 미국에 진출하고자 하는 개인과 기업의 선호도도 줄어들 것"이라고 분석했다.
현재 유학생들에게는 현실적인 대책이 없어 다른 나라로 이동하는 등의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김 교수는 "정책에서 비롯된 문제라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이 있겠냐"며 "트럼프 행정부의 특성상 언제 또 바뀔지 모르기 때문에 그사이에 호주, 캐나다 등 영어권 다른 국가에 직업을 알아보는 대안을 찾을 수는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럴 때는 오히려 한국이 적극적으로 인재들을 불러들이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며 "지금 첨단 산업의 기술 인력들이 많이 빠져나갔는데, 한국인뿐만 아니라 외국의 우수 인력들을 한 명이라도 더 끌어와 인재 풀을 넓힐 수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