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7일 새벽 시간 서울 종로구에서 환경미화원들이 작업을 하고 있다. 사진은 기사와 직접 관련 없음. 송선교 기자최근 서울 강서구 화곡동에서 쓰레기 수거차와 전봇대 사이에 끼여 숨진 50대 환경미화원이 근로계약서도 없이 작업을 해왔던 것으로 확인됐다. 환경미화 작업과 관련해 위법적 정황이 드러난 가운데 강서구청의 부실 관리·감독 문제가 도마 위에 모른 모양새다.
또 사망자의 만료된 과거 근로계약서에는 '근로자의 과실로 발생한 사고는 전적으로 근로자가 감수하고 처벌받는다'는 조항도 포함된 것으로 확인됐다. 노동자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조항인데도, 구청은 뒷짐만 진 상황이었다.
근로계약서 없이 일하다 숨진 환경미화원
연합뉴스
29일 CBS노컷뉴스가 서울 강서구의회 김민석 의원으로부터 확보한 50대 남성 환경미화원 A씨 근로계약서 등에 따르면, A씨와 그가 속한 업체 K산업의 계약은 지난 5월 13일 만료됐다. 지난해 5월 14일부터 1년간 맺은 근로계약이었다.
이후 A씨와 K산업은 재계약을 위한 별도의 새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그런데도 A씨는 지속적으로 생활폐기물 수집·운반 작업 등에 투입됐고, 지난 18일 결국 사고를 당했다. 당일 오전 3시 30분 A씨는 쓰레기 수거차 후미에 매달린 상태로 작업하던 중, 마주 오던 순찰차를 피해 후진하는 수거차와 전봇대 사이에 끼였다. A씨는 곧바로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같은 날 끝내 숨졌다.
근로계약서는 노동자와 사업자(사용자) 양쪽 모두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반드시 작성돼야 한다. 특히 법적인 분쟁을 예방하거나 해결해 줄 수 있는 중요한 판단 근거 자료로도 사용된다. 근로기준법 제17조에 따르면 사용자는 근로계약을 체결하거나 변경할 때 임금·소정근로시간·휴일·연차유급휴가 등이 명시된 서면이나 전자문서를 근로자에게 지급해야 한다. 이를 위반할 시 같은 법 114조에 따라 5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내려질 수 있다.
최소한의 절차조차 지켜지지 않은 채 A씨가 숨진 상황에 이번 사업을 발주한 강서구청의 부실한 관리·감독도 도마 위에 오르는 상황이다.
강서구의회 김민석 의원은 "계약을 새로 쓰면서도 기간을 갱신하지 않고 임금만 바꾼 것은 정상적인 계약 방식이 아니다"라며 "계약 자체가 엉터리로 작성돼 있었고, 이는 구청의 관리·감독 부실이 불러온 명백한 인재"라고 비판했다.
강서구청 관계자는 "업체가 깜빡하고 계약 연장을 잊은 것은 사실이라고 인정했다"면서도 "근로 무효 여부와 위법 사항 등에 대해서는 자문을 마쳤다"고 밝혔다. 이어 "업체가 노무사 자문을 받아봤는데 임금과 다른 근로 조건에 변동 사항이 없으면 근로 계약은 계속 연장되는 것이 묵시적으로 인정된다고 하고, 관련한 판례도 있다"고 해명했다.
"과실로 생긴 재해·사고, 전적으로 근로자가 감수" 황당 조항
지난 18일 서울 강서구 화곡동에서 끼임 사고로 숨진 50대 환경미화원이 지난해 맺었던 근로계약서에 '근로자의 과실 등으로 생긴 사고에 대해 전적으로 근로자가 감수하고 처벌받는다'는 취지의 조항이 있다. 서울 강서구의회 김민석 의원 제공A씨가 지난해 맺은 근로계약서에는 노동자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한 조항이 포함됐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A씨가 지난해 5월부터 올해 5월까지 맺은 근로계약서에는 '근로자의 고의·과실·안전관리자의 지시 미이행으로 생긴 재해나 사고에 대하여는 전적으로 근로자가 감수 및 처벌을 받는다'는 조항이 포함됐다. 과실로 인한 문제까지도 노동자가 오롯이 떠안아야 한다는 내용이다.
직장갑질119 권두섭 변호사는 "노동자 입장에서는 책임을 떠넘기는 식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조항"이라고 지적했다. 권 변호사는 "근로자의 과실이 있더라도 사용자가 여러 가지 안전조치 의무를 위반했다면 그에 대해서는 사용자가 책임을 져야지, 근로자가 책임질 일은 아니다"라며 "이런 조항을 근로계약서에 둔 사례는 거의 보지 못했고, (이 조항은) 효력도 전혀 없다"고 말했다.
김민석 구의원은 "현장에 안전관리자도 없고 교육조차 제대로 이뤄졌는지 불투명한 상태에서 책임을 근로자에게 떠넘기려는 파렴치한 행위"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이어 "구청은 더 이상 책임을 회피하지 말고, 철저한 조사와 제도 개선으로 주민과 노동자의 생명을 지켜야 한다"고 촉구했다.
강서구청 관계자는 "강한 표현이 있긴 했지만, 이 내용을 가지고 (노동자에게) 전적으로 책임을 지울 수는 없다"며 "안전 보건을 위해서 경각심을 갖고 근무에 임하라는 의미에서 좀 (표현이) 강하게 기재가 된 것 같다"고 밝혔다. 이어 "(사용자가) 근로자 권리를 넘어서고 침해하는 제재를 가할 수는 없다"고 덧붙였다.
경찰은 이번 사건과 관련해 50대 남성 차량 운전자를 교통사고처리특례법상 치사 혐의로 입건해 수사 중이다. 고용노동부도 산업안전보건법 위반과 중대재해처벌법 위반 여부를 들여다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