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뭄 여파로 바짝 말라버린 강릉시 왕산면 안반데기 배추밭. 김봉래씨 제공▶ 글 싣는 순서 |
① '108년 만의 최악 가뭄' 메마른 강릉, 무너진 일상 ② "물 위기는 인재" 경고는 있었지만, 대책은 없었다 ③ "극한 기후와 수원 부족"…'목마른 대한민국' 가뭄은 진행형 ④ 물을 지켜낸 도시들 vs 물을 잃은 우리들 ⑤ '물의 경고' 기후 위기극복의 기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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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되지 않는 일상' 강릉 가뭄 피해 지속
강릉의 가뭄 재난사태 선포는 해제됐지만 역대급 가뭄이 이어진 만큼 지역사회의 피해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농민들이 자식처럼 키운 농작물은 타들어갔고, 관광객마저 급감했다. 지역 상권은 직격탄을 맞으면서 소상공인들은 추석 명절을 앞두고 어려움에 허덕이고 있다.
국내 최대 고랭지 채소 재배단지인 강릉시 왕산면 '안반데기'. 취재진이 만난 농민들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올 여름 폭염과 유례없는 가뭄 여파로 작황이 최악의 상황에 처했기 때문이다. 먹을 물조차 부족한 상황에서 제때 물을 주지도 못해 농작물이 제대로 자라지 못하면서 상품 가치가 크게 떨어졌고, 설상가상으로 병충해까지 발생해 이중고를 겪고 있다.
김봉래(강릉시농민회 회장)씨는 "배추의 경우 가뭄에 제대로 자라지도 못한데다 병충해로 속이 다 썩어들어가는 '꿀통' 배추가 되면서 올해는 정말 작황이 너무 않좋다. 심은 배추의 30%만 살려도 다행인데, 지금은 상품 가치와 함께 가격도 떨어져 내다 팔 수 없는 지경"이라고 하소연했다.
강릉시에 따르면 지난 8일부터 25일까지 농업 분야 피해 조사를 실시한 결과 282곳이 신청해 모두 가뭄 피해 농가로 확정됐다. 다만 전체 피해 면적은 사전 조사 당시 197.4ha에서 163.1ha로 다소 줄었다.
피해 품목 농가별로는 무 59곳, 배추 52곳, 대파 33곳, 들깨 62곳, 옥수수 22곳 등이다. 시는 피해 현장을 검증해 규모를 확정했으며, 추후 정부의 승인이 떨어지면 농약 대금이나 대파 비용 등 일정 부분 보상을 실시할 방침이다.
김홍규 강릉시장은 "최대한 피해 상황을 파악하고 거기에 적절한 대응을 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가뭄에 임시휴무에 들어간 경포해변 인근의 한 식당. 박창주 기자가뭄 장기화로 관광객이 줄면서 매출 감소 등 피해를 입은 소상공인들도 최악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강릉시에 따르면 지난달 30일 재난사태 선포 이후 9월 1일부터 20일까지 강릉을 찾은 관광객 수는 148만 2천명으로 지난해 같은기간(192만 1천명) 대비 약 25% 급감했다. 가뭄 여파에 숙박업소들의 예약 취소도 잇따르면서 예약률은 10분의 1 수준으로 감소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강릉시는 '재해확인서 특례 발급'을 통해 신속한 금융지원에 나서며 급한 불을 끄고 있다. 재해확인서에 산정된 금액은 지원금이 아닌 '대출 신청이 가능한 금액'으로 이 금액을 기준으로 보증서 발급 및 대출 심사가 진행된다. 고정금리는 연 2.0%, 최대 1억 원까지 대출을 받을 수 있다.
교통 택지에서 고깃집을 운영하고 있는 이상무 강릉시소상공인협회장은 "가뭄이 극심할 때는 장사를 시작해도 공치는 날도 많아 아예 자체적으로 임시 휴무에 들어가는 업소들도 많았다. 소상공인들의 경우 전체 매출에서 최소한 2~30% 가량 줄어든 것으로 파악된다"고 피해를 호소했다.
그러면서 "시민들의 소비 심리와 지역 분위기도 위축돼 있었던 만큼 다가오는 추석 연휴와 지역 가을 축제 등을 통해 가뭄으로 메말랐던 지역경기가 다시 활력을 찾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가뭄은 상시 진행형, 전국 가뭄 피해 속출
충남 보령댐. 충청남도청 제공문제는 이번 가뭄이 강릉에만 국한된 사안이 아니라는 점이다. '돌발 가뭄' 형태로 가뭄 사태가 가파르게 확산된 강릉은 물론 전국 곳곳이 가뭄 위험 지역이라는데 주목해야 한다. 이 가운데 충남은 상시 가뭄을 겪고 있던 대표적인 가뭄 피해 지역으로 꼽힌다.
보령, 서산, 당진, 서천, 청양, 홍성, 예산, 태안 등 충남 서부권 8개 시·군에 물을 공급하고 있는 보령댐은 2012년부터 현재까지 상시적인 가뭄 피해를 입고 있다. 강수량 부족과 댐 노후화로 매년 저수량이 30% 수준에 머무른 탓이다.
가뜩이나 물이 부족한 상황에서 지난해 11월 보령댐 광역상수도 공급라인 밸브 고장으로 충남 4개 시·군 주민 30만여 명이 사흘간 단수 피해를 입었다.
최악의 가뭄을 겪었던 2014~2015년의 경우 댐 저수율이 18%대 까지 떨어지면서 8개 시·군에 제한급수가 실시되기도 했다.
김성환 환경부 장관이 지난달 26일 경북 김천시 소재 감천댐 후보지를 방문하여 현장을 점검하고 지자체, 시민단체, 지역주민의 의견을 청취하고 있다. 환경부 제공불과 2~3년 전인 2022년 말부터 2023년 초 광주·전남 지역은 최근 6개월간 누적 강수량이 평년 62%에 불과하면서 '기상 가뭄' 발생일수는 281.3일을 기록, 1974년 관측 이래 역대 최장 기록을 경신했다.
전남 화순과 나주의 기상 가뭄 일수는 357일과 335일을 각각 기록했다.
주요 상수원인 동복댐과 주암댐 저수율은 25% 안팎으로 곤두박칠 치면서 전국 최대 '곡창지대'의 농업용수 공급 차질과 공업단지 물 부족이 현실화됐다. 이에 정부는 보상강 댐의 수력발전을 중단하고 발전용 댐 물을 주암댐으로 흘려보내는 특단의 결정을 내렸다.
2019년 1월~7월 강원과 경기, 전남지역 가뭄으로 9개 시·군 주민 5637명에 대한 생활용수가 제한됐고, 직전 해 8월 제주와 강원, 전남지역 99개 시·군에서 밭 시듦 등 피해로 22.7㏊의 농작물 피해가 발생했다.
강릉과 기후·지리적 특성이 가장 유사한 속초시의 경우 1992년부터 1995년, 1996년, 2001년, 2006년, 2015년, 2018년까지 총 8차례에 걸쳐 식수난으로 인한 대규모 제한급수가 실시됐다.
대표적으로 많은 비가 내리는 지역인 제주의 경우 2013년에는 한라산 백록담과 계곡, 저수지 대부분의 물이 바닥을 보였고 2017년에는 100년간의 기상 관측 이래 제주지역 연 강수량이 가장 적은 수치를 기록했다.
'기상학적 가뭄'은 왜 갈수록 악화될까?
지난 9일 강원 강릉시 오봉저수지에서 육·해·공군과 소방, 전국 지자체 및 기관이 지원한 살수차들이 수위를 높이고자 물을 쏟아붓고 있다. 연합뉴스가뭄은 흔히 기상학적 가뭄과 농업적 가뭄, 수문학적 가뭄, 사회·경제적 가뭄으로 구분된다.
이 가운데 강릉을 비롯해 전국 곳곳에서 막대한 피해를 불러온 것은 결국 '기상학적 가뭄'이었다.
기압계의 변화로 강수 분포가 왜곡되거나, 장기간 비가 내리지 않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땅과 저수지가 함께 말라버린다.
이처럼 비 부족 상태가 누적되면 저수지와 댐의 저장 능력이 버티지 못하고, 곧바로 생활·농업·공업용수 위기로 전이되는 '연속 누적 약화 구조'가 작동한다.
여기에 구조적 취약성이 겹쳤다. 우리나라는 생활·농업용수의 상당 부분을 댐과 저수지라는 단일 수원에 과도하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번 저수율이 급격히 하락하면 곧장 제한급수, 급수차 동원 등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특히 도서·산간 지역은 빗물을 모은 소규모 저수지에 기대는 경우가 많아 가뭄 시에는 사실상 외부 급수 지원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이번 가뭄 사태와 관련해 강릉시는 지난 7월 성내동 보조수원에 관로를 신설해 홍제정수장에 물을 공급하는 방법과 남대천 용수개발에 착수하는 등 보조수원 확보에 나섰으나 생활용수 공급 차질은 불가피했다.
보조수원은 땅 속 지하수를 끌어오는 방법인 관정을 통한 지하수 확보, 하천과 댐 간 관로 연결, 하수처리수 재이용, 관망 누수 개선, 해수담수화, 빗물저장 등이 해당된다.
김희정 강원대학교 지질학과 교수는 "가뭄은 강수량이 늘었는데 강수일수가 줄어드는 극적인 기후 변화의 패턴 때문"이라며 "기후적 요인으로 발생한 것이 맞지만 구조적으로 취수원과 보조수원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이 사태를 키운 것"이라고 진단했다.
김 교수는 "기후 변화를 예측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용수를 안정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보조 수원 확보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전국 시·군별 가뭄취약성 평가 결과. 환경부 한강홍수통제소 전국 가뭄취약 지도(2023.6) 자료 캡처이 같은 문제는 환경부 한강홍수통제소 전국 가뭄 취약지도 보고서에서도 확인된다.
연구팀이 최근 30년간 가뭄 발생 빈도와 지속 기간을 기준으로 한 '노출도'와 인구·농업 의존도를 반영한 '민감도', 가뭄 발생 시 버틸 수 있는 저수 능력을 뜻하는 '대응능력', 보조 수원 확보 여부까지 가중치를 적용해 평가한 결과 속초·동해·고흥·보령·거제·울릉·제주 등 12개 시·군이 Ⅴ(매우 취약) 또는 Ⅳ(취약) 등급으로 분류됐다.
분석 결과 가뭄 취약 지역의 공통점은 짧은 용수공급가능일수와 보조 수원의 부재라는 점이 명확했다. 도서·산간지역은 지형적 요인으로 광역상수도 연계망이 부족하고 저장 여력도 낮아 위험도가 훨씬 커졌다.
구체적으로는 강원 영동지역처럼 산지가 많아 소규모 급수권이 많은 곳은 평균 용수공급가능일수가 내륙 지역보다 현저히 짧게 나타났다.
강원도 전체 평균 용수 공급가능일수는 535일이지만, 속초는 75일, 동해 102일, 양양 168일에 불과했다. 연구팀은 속초·동해를 '매우 취약(V)' 지역으로 분류했다.
제주 역시 사정은 비슷하다. 제주시와 서귀포시는 용수공급가능일수가 200일 미만으로 절대치만 보면 비교적 높았지만, 빗물 저장 능력과 보조 수원 한계로 평가 등급은 매우 취약했다.
연구팀은 "우리나라는 최근 지역·계절별 강수편차가 증가하고, 특정지역에 강수량이 부족해 국지적인 가뭄이 빈발하고 있는 실정"이라며 "가뭄 유형에 따라 부처별 전문성 및 협력체계 강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4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