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이른바 '외교 슈퍼위크'로 불리던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주간 일정이 1일 한중 정상회담을 끝으로 사실상 마무리됐다.
미국과 중국, 일본 등 주요국 정상이 한 자리에 모이면서 어느 때보다 관심이 집중됐는데, 이재명 대통령은 이들 국가 모두와의 외교에서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는 평가다.
드디어 넘긴 관세협상 파고…핵추진 잠수함까지
지난 29일 열린 한미 정상회담의 결과물은 '깜짝' 소식에 가까웠다.
당초에는 한미 관세협상 후속 협의가 대미 투자 방식과 관련한 세부사항 조율을 두고 난항에 빠지면서 이번 회담에도 합의안이 도출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 줄곧 제기돼왔기 때문이다.
이재명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29일 경북 경주박물관에서 정상회담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이같은 예상과 달리 정부는 이번 정상회담을 계기로 총 3500억 달러 투자액 중 2천억 달러 현금 투자, 연간 최대 상한액 200억 달러 설정, 우산형 SPC 구조 도입 등의 조건을 성사시키며 자동차와 부품 관세율을 15%로 낮췄다.
현금 투자 규모를 늘리고, 지급 시기도 앞당기려던 미국 측의 요구에 끝까지 맞서며 이 같은 타결안을 얻어냈다는 점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대통령실 김용범 정책실장은 "며칠 만에 우리가 양보해서는 합의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시기 때문에 국익을 소홀히 하는 일은 없다"고 말했다.
한미 정상회담의 또 하나의 성과는 '핵추진 잠수함'의 도입이다. 양국 간 현안 중 최대 관심사는 관세협상이었지만, 이 대통령이 이날 회담장 테이블에서 꺼낸 이슈는 핵추진 잠수함 지원 요청이었다.
그는 구식 잠수함을 이용한 한반도 인근해에서의 타국 잠수함 추적 활동의 애로사항을 언급하며 "핵추진 잠수함의 연료를 우리가 공급받을 수 있도록 트럼프 대통령께서 결단을 해 주시면 좋겠다"고 직접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후 "한국의 핵추진 잠수함 보유에 공감한다"며 이를 수용했다.
시진핑 주석과의 첫 대면…중단됐던 교류에 '물꼬'
이 대통령은 1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의 첫 정상회담에서는 한중 통화스와프 연장을 비롯한 7건의 양해각서(MOU) 체결 등을 이끌어냈다.
이날 체결된 '보이스피싱·온라인 사기 범죄 대응 공조 MOU'는 최근 캄보디아 등 동남아 일대 국가들과 공조 수사에 나설 정도로 국제사회적 문제가 된 온라인 스캠(사기) 범죄 대응의 일환이다.
유재성 경찰청장 직무대행과 다이빙 주한중국대사가 1일 경북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이재명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참석한 가운데 '보이스피싱ㆍ온라인 사기범죄 대응 공조' 양해각서를 체결하고 있다. 연합뉴스반면 통화스와프 체결은 기존 스와프가 만료된 것을 연장하는 의미이고, 나머지 MOU도 '한중 경제협력 공동계획', '서비스무역 교류·협력 강화', '실버 경제 분야 협력', '혁신 창업 파트너십 프로그램 공동추진', '한국산 감 생과실의 중국 수출 식물 검역 요건' 등 굵직함과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민생 의제를 발굴해 협력에 나섰다는 평가다.
특히 이번 회담은 한동안 사실상 중단됐던 중국과의 교류를 재개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이날 회담에서는 양국 간 고위급 정례 소통채널을 가동하자는 합의가 이뤄졌다. 구체적인 시기는 정해지지 않았지만, 시 주석은 직접 이 대통령을 중국에 초청했다.
대통령실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이재명 정부의 국익과 실용에 기반한 대중외교를 통해 한중관계를 전면적으로 복원하는 성과가 있었다"며 "양 정상은 시대의 변화에 발맞춘 한중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의 성숙한 발전을 추진해 나가자는 데 뜻을 같이했다"고 말했다.
'우려'에서 '걱정 사라진' 다카이치…"훌륭한 정치인"
지난달 30일 성사된 이 대통령과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와의 정상회담은 다자 회담 중 이뤄진 탓에 41분에 그쳤지만, 양 정상간 향후 우호 협력의 분위기를 이끌어내기에는 충분했다는 평가다.
한국 내에서는 다카이치 총리에 대해 강경 우파 내지는 극우 성향이라는 평가가 다수 나왔고, 반대로 일본 내에서는 이 대통령에 대해 극좌라는 평가가 제기되면서 양 정상간 소통이 잘 이뤄질 수 있겠느냐는 우려가 제기돼왔다.
하지만 이를 불식시키듯 양 정상은 양국간 안정적이고 미래지향적인 협력의 필요성에 공감했다.
이 대통령은 전임인 이시바 시게루 전 총리와 나눴던 것과 같이 "문제와 과제가 있다면 문제는 문제대로 풀고, 과제는 과제대로 해나가야 한다"며 과거사 문제는 과거사 문제대로, 협력 현안은 협력 현안대로 풀어가겠다는 뜻을 재확인했다.
1일 진행된 APEC 의장국 자격 기자회견에서는 한일 정상회담에 대한 소감을 묻는 일본 취재진의 질문에 "만나기 전에는 '혹시'하는 걱정을 안 한 것은 아닌데, 직접 만나 뵙고 상당한 시간 대화를 나눠보니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아주 훌륭한 정치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솔직하게 아주 좋은 느낌을 받았다. 걱정이 다 사라졌다"고 다카이치 총리를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이시바 전 총리와 재개한 한일 셔틀외교 또한 지속될 전망이다. 이 대통령은 "다음은 셔틀외교 정신상 제가 일본을 방문해야 하는데 가능하면 나라현(県)으로 가자고 말씀드렸다. (총리) 본인도 아주 흔쾌하게 좋아하셨다"며 차기 회담 가능지역을 직접 언급하기도 했다.
핵잠 건조, 한한령, 과거사…남은 과제는 어떻게?
외교적 성과가 상당했다는 평가를 받는 미·일·중 정상과의 연쇄 회담이었지만, 아직 해결해야 할 과제는 남아있다.
미국과는 핵추진 잠수함을 실제로 운영하기까지의 과정이 숙제다. 이 대통령은 정상회담을 통해 연료 부분에 대한 지원을 요청했다.
위 실장도 관련 질문에 "다양한 보도들과 언급들이 있어서 조금 혼란스럽긴 한데, 저희는 주로 연료 부분에 대해서 미국에 도움을 청한 것"이라며 "연료에 대해서 승인을 받았다"고 답했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한국은 핵추진 잠수함을 바로 여기 훌륭한 미국 필라델피아 조선소(필리조선소)에서 건조할 것"이라며 연료 제공만이 아닌 핵잠 자체를 미국 내에서 건조해야 한다고 조건을 걸었다.
위 실장은 연료 이외의 "나머지는 양국의 입장이 정리되는 대로 한번 소상히 설명드릴 기회를 가져보겠다"며 말을 아꼈다.
중국과는 협력 의사를 확인했지만 한한령, 필리조선소를 인수한 한화오션에 대한 제재, 서해안 구조물 설치 등 민감 사안에 대해서는 뚜렷한 성과물을 받아들지 못했다.
일본과는 '문제는 문제대로, 과제는 과제대로'라는 원칙은 세웠지만, 협력만 얘기했을 뿐 과거사 등 민감 현안에 대한 논의는 전임 이시바 정권을 비롯해 아직까지 착수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주요국들과는 논의할 현안이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현안 별로 속도 차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며 "미국과는 이제 처음 상호 방문을 이뤘고, 중국, 일본 정상과는 처음 만난 만큼 이번 회담을 계기로 차츰 세부적인 논의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