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인공지능(AI) 시대"라는 구호가 일상이 됐지만, 소비자들에게는 실체 없는 'AI 제품'이 쏟아지고 있다. 명확한 AI 기술을 적용하지도 않고 용어만 앞세워 소비자의 주목을 끄는 이른바 'AI 워싱(Washing)'이 시장 신뢰를 흔들고 있다.
8일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공정위는 한국소비자원과 함께 AI 워싱 공동 대응 체계를 마련 중이다. 전날에는 양 기관이 함께 'AI 워싱' 의심 표시·광고에 대한 첫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AI 워싱'은 실제로는 관련 기술이 적용되지 않았거나 매우 제한적으로 적용된 제품·서비스를 마치 혁신적인냥 광고하는 행위를 말한다. 이는 친환경성이 떨어지는 제품을 '그린'으로 포장하는 '그린워싱'과 유사한 마케팅 전략으로, 소비자를 기만할 우려가 크다.
공정위와 소비자원의 조사 결과, 가전·전자제품을 중심으로 AI 기능을 과장하거나 오해의 소지가 있는 광고 20건을 적발해 자진 시정 조치를 유도했다. 적발 대상들은 주로 단순 센서 기능만 탑재하고도 'AI 세탁', 'AI 냉방' 등으로 홍보했다.
공정위 관계자는 "실제로는 AI 기술과 무관한 기능임에도 제품명에 AI를 붙여 소비자의 구매 선택에 영향을 주는 사례가 많았다"며 "이번 조사는 시장 실태 파악을 위한 첫걸음"이라고 밝혔다. 공정위는 이번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내년 중 AI 워싱을 방지하기 위한 가이드라인을 제정할 계획이다. 이미 올해 업무계획에도 AI 워싱을 중점적인 감시 분야 중 하나로 포함한 바 있다.
이러한 AI 워싱은 이미 전 세계적 현상이다.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에 따르면, 글로벌 대기업 코카콜라는 지난해 2023년 신제품 'Y3000'을 AI와 공동 개발한 음료라고 홍보했지만, AI를 개발 과정에 어떻게 활용했는지 끝내 설명하지 않아 업계의 비난을 산 바 있다.
채용 스타트업 '준코'는 AI로 다양성을 고려한 인재 매칭을 구현한다고 주장하며 2100만 달러의 투자를 유치했지만, 실제로는 단순 추천 시스템에 불과했다. AI 예측을 내세운 투자자문사들도 실제 AI를 사용하지 않은 사실이 드러나 벌금을 부과받은 사례도 있다. 이처럼 AI 워싱은 단순한 과장광고를 넘어 대형 사기 사건이 될 수도 있다.
지난 7월 공정위가 실시한 소비자 인식조사 결과에 따르면, AI에 대해 이해하고 있다는 소비자 3천 명 중 절반 이상(57.9%)은 일반 제품보다 비싸더라도 AI 기술이 적용된 제품을 구매할 의향이 있다고 응답했다. 이들은 평균 20.9%의 추가 비용을 감수할 용의가 있다고 답했다. 하지만 응답자의 67.1%는 실제 AI 기술이 적용된 제품을 구분하기 어렵다고 응답했다. 그만큼 AI 워싱 허위 광고에 혹하기 쉬운 상황이다.
AI 기술이 점차 가전제품, 일상 소비재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게 될 만큼, 소비자들부터 AI 워싱에 대한 기준이 서둘러 정비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공정위의 인식조사에서 응답자들은 'AI 워싱 예방을 위한 가이드라인 마련'(31.5%), '국가 기술표준 및 인증제도 도입'(26.1%), '상시 모니터링 체계 구축'(19.4%) 등을 주요 정책 과제로 꼽았다.
그럼에도 현재 AI 제품에 대한 법적 정의나 기술 표준은 없는 실정이다. AI 기술의 적용 범위와 실질성을 판단할 수 있는 공적 기준 없이, 기업들은 마케팅 목적으로 AI라는 용어를 무분별하게 사용하고 있다. 공정위가 소비자가 오인하지 않도록 표시광고법을 토대로 가이드라인을 준비 중인 이유다.
인하대학교 소비자학과 이은희 교수는 "소비자들이 AI란 단어에 혹하는 경향이 있다"며 "AI워싱이 난립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AI제품에 대한 규정을 선언적으로라도 포함시키는 최소한의 법적 정비가 시급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