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 대한장애인e스포츠연맹의 사무국장이던 이모씨가 대회 상금 등을 비롯해 수억 원을 횡령해 잠적한 직후 선수들의 단체 채팅방에서 대회 상금 지급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다. 며칠 뒤 연맹에선 '이 전 사무국장과 금전적 거래를 하지 말아주시길 바란다'고 공지했다. 장애인e스포츠계 관계자 제공장애인e스포츠계가 지난해 말 연맹 직원의 수억 원대 사기·횡령 사건이 벌어진 뒤 1년째 사태 수습이 제대로 되지 못한 채 곪아가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잠적한 직원은 여전히 검거되지 못한 상태다. 사태 이후 연맹의 회장이 바뀌었지만, 전임 회장과 현 회장이 단체의 소유권을 두고 갈등을 벌이는 등 내부 분위기도 여전히 뒤숭숭한 상태다.
'횡령' 사무국장 소재 불명으로 수사 중지 상태
사건이 벌어진 대한장애인e스포츠연맹(이하 중앙연맹)은 대한장애인체육회의 준가맹단체로 전국에서 장애인e스포츠 대회를 주최·주관하고 선수 육성 및 관리, 국가대표 선출 등을 주관해 왔다. 2008년 창립 이후 현재는 전국 시·도·군에 지부를 두고 있으며 그간 국내 장애인e스포츠의 저변 확대와 발전에 이바지해 온 단체로 평가된다.
18일 CBS노컷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지난해 9월 중앙연맹의 사무국장 이모씨가 중앙연맹 계좌에 있던 자금 등을 수억 원가량 빼돌린 뒤 잠적했지만, 여전히 이씨의 행방은 묘연하다. 사건을 수사한 천안 동남경찰서는 지난 3월 피의자 소재 불명을 이유로 수사를 중지한 상태다. 현재 이씨는 지명수배돼 있어 흔적이 발견되거나 검거되면 수사는 재개된다는 게 경찰 설명이다.
이씨가 횡령해 간 돈은 모두 합쳐 5억 원을 넘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씨의 범행은 단순 횡령이 아닌 연맹의 임원 등 관계자, 장비 대여 업체 등에 연맹 사업이라는 각종 명분을 들어 연맹 계좌로 수금한 뒤 이를 빼돌리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사기 피해자들은 개인당 적게는 수십에서, 많게는 수억 원의 피해를 봤다. 이씨는 심지어 장애인 선수를 상대로도 돈을 빌리는 등 사기 행각을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씨가 빼돌린 돈에는 지급되지 못한 대회 운영비와 인건비, 심지어는 상금 등도 포함됐다. 상금과 심판 인건비 등은 뒤늦게 일부 지급됐지만 아직 돈을 돌려받지 못한 피해자들이 대다수다. 피해자들은 중앙연맹에서 피해금을 갚아줘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지만 연맹은 "이씨 개인이 사기를 벌인 피해금들이 대부분이고, 연맹도 구조상 수익이 없어서 돈을 줄 수가 없는 상황"이란 입장만 되풀이 중이다.
현 사무국, 전임 회장 횡령·배임 등 조만간 경찰 고소
이씨 횡령 사건의 여파는 연맹 내부뿐 아니라 장애인e스포츠계 전반에 적잖이 악영향을 끼쳤다. 이씨가 대회 자금을 빼돌린 탓에 2016년부터 매년 치러졌던 '흥타령배' 전국장애인e스포츠대회를 비롯해 일부 전국·지역별 단위의 대회들이 아예 폐지되거나 열리지 못했다. 대회 성적들은 장애인 선수들의 대학 진학, 취업 등에 영향을 미친다. 이씨의 범행이 여러 선수와 가족들의 중대한 기회를 앗아간 셈이 됐다.
사태를 수습해야 할 중앙연맹의 내부 상황도 좀처럼 정리되지 않고 있다. 사건 당시 회장이었던 이명호 전 회장이 책임을 지고 사퇴한 뒤 박현수 현 회장이 취임했지만 최근까지 두 사람은 중앙연맹의 법인 인계 문제 등을 놓고 마찰을 빚고 있다. 중앙연맹은 같은 이름의 비영리 단체와 사단법인으로 운영돼 왔는데, 이 전 회장이 사단법인의 소유권은 넘길 수 없다고 버티면서다.
이와 관련해 전임 이 전 회장은 CBS노컷뉴스에 "내가 사퇴한 이후 연맹이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고 있고 박 회장이 '연맹을 없애겠다' 이런 얘길 해서 사단법인은 넘기지 못하겠다"고 주장했다. 박 회장은 "취임 이후 사태 수습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면서 "횡령 사태에 책임이 있는 전임 회장이 '다시 연맹을 만들겠다'고 하고 다니고 있는 것이다. 나는 연맹을 없애겠다는 말을 한 적 없다"고 반박했다. 주변에선 자칫하면 중앙연맹이 둘로 쪼개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횡령 사태에 대한 책임 공방도 앞으로 더 벌어질 전망이다. 현 연맹 사무국은 이 전 회장에 대해 횡령과 배임 등 혐의로 조만간 경찰 고소를 진행한다는 계획이다. 박 회장 측은 이 전 회장이 전임 사무국장의 횡령을 사전에 인지했을 것이라고 의심하고 있다. 반면 이 전 회장은 "사람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진 것은 전적으로 내 책임이지만 직접 횡령을 하거나 관여한 바는 전혀 없다"는 입장이다.
장애인e스포츠선수들이 한 대회에서 경쟁하고 있다. 대한장애인e스포츠연맹 홈페이지현 사무국 향한 불만으로 내부 잡음도
이뿐만 아니라 횡령 사태의 여파로 중앙연맹의 사무국장을 비롯해 내부 관계자들이 새롭게 교체되거나 대거 그만두면서 연맹 내 일부 잡음도 이어지고 있다. 연맹 일이나 대회 운영 방식 등에 갑작스러운 변화가 생기면서 사무국을 향해 불만이 표출되거나 갈등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1년째 이사진을 비롯한 임원 구성도 되지 않고 있어 조직 운영에 차질이 있는 것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내부 갈등과 책임 공방만 계속되는 사이,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건 결국 선수들이란 지적이 나온다. 장애인e스포츠계의 한 관계자는 CBS노컷뉴스에 "횡령부터 전·현직 회장의 갈등까지 결국엔 어른들이 욕심을 부리면서 연맹은 다 망가지고 선수들만 다치고 있다"면서 "이미 벌어진 횡령은 되돌릴 수 없지만, 이제는 개인 욕심보다 선수들만 생각해서 중앙연맹과 그 관련된 사람들이 힘을 모아서 사태 수습에만 매진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최대한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도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10년 가까이 선수 활동을 해 온 한 장애인e스포츠 선수는 "횡령 사태로 상처가 컸는데 여전히 내부 상황이 완전히 복구되지 않은 것 같아 속상하다"면서 "하루빨리 연맹 상황이 다 정상화돼서 한국의 장애인e스포츠가 더 발전하고 대회도 더 활발하게 열리면 좋겠다"고 했다.
다른 장애인e스포츠 선수의 가족은 "장애인e스포츠는 선수들과 가족들에겐 희망이자 꿈을 꾸고 미래를 만들 수 있는 좋은 기회의 장"이라며 "현 사무국에서도 사태 수습을 위해 애쓰고 있는 것으로 안다. 연맹이 횡령 사건 이전으로 돌아가 더 좋은 모습을 보여주길 기대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