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환경보건시민센터에서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이 피해 증언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황진환 기자정부가 가습기살균제 사건을 '참사'로 명확히 규정하고, 기존 피해구제체계를 국가 책임에 따른 '배상' 체계로 전면 전환한다. 손해배상청구권 장기 소멸시효도 폐지한다.
학령기 피해 청소년은 중·고등학교 진학 시 주거지 인접학교를 희망하면 우선 배정하고, 대학 등록금 일부를 지원한다. 또 군복무 시 건강특성을 충분히 고려한 판정체계 마련 및 취업지원 등 피해자의 생애 전주기에 걸쳐 지원한다.
지난 2006년 원인미상 폐손상 환자가 발생한 뒤 약 20년 만에야 범정부 차원의 종합대책이 나온 것이다.
정부는 2008년 원인 조사를 실시한 끝에 2011년에서야 그 상관관계를 규명했다. 이후 관계부처 합동 대책 수립에 나선 뒤 2014년 7월 환경부(기후에너지환경부) 차원의 '피해구제'를 개시, 구제 신청자 8035명 중 현재까지 5942명이 피해자(구제급여 지급 대상)로 인정했다.
그러나 더딘 구제와 구제 사각지대 등 지원 미비로 피해자·유족 불신이 깊어진 가운데, 지난해 6월 대법원은 신규 화학물질인 PHMG·PGH의 유해성 심사 및 공표 단계에서 정부 역할이 미흡했다고 보고 이들 물질을 함유한 살균제 피해의 국가책임을 인정한 바 있다.
폐손상 환자 발생 뒤 약 20년 만에…국가 배상 책임 강화
정부는 24일 오전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국무총리 주재 제8회 국가정책조정회의에서 '가습기살균제 참사 피해자 종합지원대책'을 확정했다고 밝혔다.
정부 제공
손해배상 책임을 기존 '기업' 단독에서 '기업과 국가'가 공동으로 부담하는 방식으로 변경, 국가의 역할을 강화한 게 핵심이다.
기후에너지환경부 소속 '피해구제위원회'를 국무총리 소속 '배상심의위원회'로 개편하고, 2019년부터 2021년까지 출연 이후 중단됐던 정부 출연을 재개한다. 이를 위한 내년 예산으로는 100억 원을 편성한 상태다.
또 피해자들에게 적극적 손해인 치료비와 소극적 손해인 일실이익(사고로 장래 얻을 수 있었던 소득을 잃은 손해) 및 위자료 등을 지급한다.
배상금 수령 방법에 대해선 선택권을 부여한다. 피해자는 일시금 수령 방식 또는 일부 금액을 먼저 수령한 후 치료비를 계속 받는 방식 중에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국가 주도 추모사업도 추진한다.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를 위한 특별법' 목적에 '추모'를 추가하고, 피해자들과 협의로 추모일을 지정해 공식 추모행사를 개최한다는 계획이다.
교육-국방-취업-질병 등 생애 全주기 지원
아울러 국무조정실을 중심으로 범부처 전담반(TF)를 구성해 각 부처 소관 개선과제를 종합적으로 검토, 범부처 협업으로 생애 전주기에 걸쳐 지원한다.
정부 제공'학교생활기록부 기재요령'을 개정해 질병결석 인정 사유를 명확히 하고, 질병결석 사유도 병원 진료뿐 아니라 '질환으로 인한 가정내 요양' 및 '정신건강 진단 참석'까지 확대한다.
사회복무요원의 경우 호흡기에 부담이 될 수 있는 근무지는 제외하고, 현역으로 입대할 경우 소총과 박격포 등 신체활동이 많이 필요한 주특기는 제외한다.
사회에 진출하는 피해 청년은 국민취업지원제도, 청년도전지원사업, 대학일자리플러스센터 등을 통해 적극 지원한다.
일터에서 치료가 필요한 경우 휴가도 보장된다.
일상회복을 위해 피해자는 진료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본인일부부담금의 경우 치료비 대납을 통해, 기존과 같이 피해자가 치료비를 먼저 납부하고 한국환경산업기술원을 통해 정산받는 불편을 해소한다.
평생 중증질환을 관리하기 위해 성장과정 중 건강상태를 분석해 이상소견이 발견되는 경우 조기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한다. 건강피해 인과관계 연구도 '호흡기계' 중심에서 '만성 및 전신질환과 그 후유증'까지 확대한다.
가습기살균제 중증도 피해자 민수연 씨가 휴대용 산소통과 연결된 콧줄을 끼고 지난 8월 6일 국회의원회관 제1세미나실에서 열린 간담회에 참석해 발언하는 모습. 최서윤 기자 지속적 소통 창구 마련…특별법 전부개정 추진
담당 산하기관 조직도 개편한다. 한국환경산업기술원의 환경보건처를 '환경오염피해지원본부'로 격상시켜 가습기살균제 및 석면·환경오염 피해 발굴과 지원을 전담하는 기구로 개편한다.
피해자 간 소통과 건강정보 제공 등을 위해 마련한 소통공간을 활성화하고, 기후에너지환경부 내 소통팀 운영 및 온라인 간담회 등으로 상시 소통체계를 강화한다는 계획이다.
국회와 협력해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를 위한 특별법' 전부개정도 추진한다.
이날 발표한 종합대책은 앞서 지난 8월 국회의원회관에서 공개적으로 진행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단체 대표-당정 간담회' 중 나온 피해자 및 유족 요청을 상당 부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피해자·유족 22개 단체 27명의 참석자 모두가 발언 기회를 통해 구제 미비 및 피해 아동의 성장 과정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어려움을 호소한 바 있다. (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 합의 아닌 배·보상이 맞는 표현" 고개 숙인 환경장관, 2025. 8. 7.)
정부는 "2026년을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 방식의 전면 전환의 원년으로 삼고, 오랜기간 고통을 겪었던 피해자들이 조속히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후속 조치를 속도감 있게 이행하겠다"고 강조했다.
한편 이재명 대통령은 이날 오전 페이스북 게시물을 통해 "1994년부터 아무런 의심 없이 사용해 온 가습기살균제가 사랑하는 가족의 건강과 생명을 앗아갈 줄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며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현실에 얼마나 억울하고 참담하셨을지 감히 헤아리기조차 어렵다"고 했다.
이어 "이제 국가가 그 피해를 온전히 배상하겠다"면서 "학생, 군 복무 중 청년, 직장인 등 각자의 자리에서 겪고 있는 어려움을 세심히 살필 수 있도록 맞춤형 지원을 할 계획"이라며 피해자와 유가족에게 애도와 위로를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