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측부터 빈센트 앤 코 브랜드 시계, 엘리자베스 홈스. 연합뉴스명품 시계와 피 한 방울. 2000년대 초 등장한 한 브랜드와 한 스타트업은 한국과 미국 사회를 뒤흔들었다.
100년 동안 유럽 왕실만을 고객으로 상대해 왔다고 주장한 명품 시계 브랜드 빈센트 앤 코(Vincent & Co)의 갑작스러운 출현은 강남 부유층과 유명 연예인들의 지갑을 기꺼이 열게 했다.
'세계 상위 1%만 구매할 수 있다'는 마케팅에 시계 가격은 최고 9750만 원에 달했지만, 실제 제작 단가는 중국산과 국산 부품을 조합해 약 20만 원대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났다. 브랜드 역사와 정체도 허위로 나타났다.
미국 실리콘밸리에서는 소량의 혈액으로 250여 종의 질병을 진단할 수 있다고 내세운 스타트업 '테라노스'가 주목받았다. 2003년 만 19살의 나이로 회사를 창업한 엘리자베스 홈스는 '여성 스티브 잡스'라고 불리며 정·재계의 주목을 받았다.
2015년 테라노스의 기업 가치는 무려 90억 달러(약 12조 800억 원). 엘리자베스는 포브스가 선정한 '미국의 자수성가형 여성' 1위에 올랐지만, 결국 실체가 드러나며 2018년 9월 청산 절차를 밟았다.
이처럼 넷플릭스 시리즈 '레이디 두아'와 훌루·디즈니플러스(+) 시리즈 '드롭아웃'은 해당 실화 사건을 모티브로 하거나 기반으로 재구성한 작품들이다. 허영과 기만으로 사람들을 속인 실화 사건을 바탕으로 한 두 작품을 조명한다.
강남 한복판에서 발견된 시신…'눈'의 메시지
시리즈 '레이디 두아'. 넷플릭스 제공한겨울 강남 한복판의 하수구에서 신원 미상의 여성 시신이 발견된다. 부검 결과 얼굴뿐 아니라 지문조차 조회되지 않는 가운데 발목에서 '화려한 우울'이라는 문신만 확인된다.
서울경찰청 강력범죄수사대 1팀장 형사 박무경(이준혁)은 이 사건을 맡아 수사에 나선다. 시신 주변에 발견된 가방을 단서로 화장품 브랜드 녹스 대표 정여진(박보경)을 만나게 되고 그의 증언을 통해 시신의 신원은 사라킴(신혜선)으로 특정된다.
사라킴은 한 백화점 고급 브랜드 매장에서 갑작스럽게 등장한 인물이다. 이른바 상위 0.1%만을 상대하는 명품 브랜드 '부두아'의 아시아지사장을 맡고 있다.
상위 1%에 오르기 위해 노력하던 정여진은 삼월백화점 최재우(배종욱) 회장에게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하기에 이르게 되고 사라킴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정여진의 마음을 파고든다. 사라킴은 결국 거액의 투자를 끌어내는 데 성공한다.
"시작은 허풍일지라도 끝이 성공이라면 사기가 아닌 성공이죠." -사라킴수사망이 좁혀지면서 사라킴의 과거가 하나둘 수면 위로 떠오르고 박무경은 마침내 사라킴과 마주하기에 이른다. 사라킴이 묻는다.
"진짜와 구별할 수 없는데 가짜라고 볼 수 있나요?"
시리즈 '레이디 두아'. 넷플릭스 제공연출을 맡은 김진민 감독은 인물의 심리를 부각하기 위해 전반적으로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방식의 촬영을 택했다. 또, 화면 중앙의 인물을 부각하기 위해 양쪽 배경을 흐릿하게 처리하는 기법을 활용했다.
이 같은 촬영 방식은 일부 장면에서 다소 답답한 인상을 주지만, 인물의 미묘한 심리를 밀도 있게 담아내기 위한 연출적 선택으로 풀이된다.
또, 작품 곳곳에 등장하는 '눈'의 이미지는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기 어려운 작품의 핵심 메시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동시에 사건의 흐름을 전환하는 장치로도 활용됐다.
여기에 다양한 인물을 연기한 신혜선은 한 인물의 복합적이고 뒤틀린 삶을 입체적으로 그려냈다. 앞서 8년 만에 함께 호흡한 이준혁도 "그동안 쌓아온 신혜선의 연기를 집대성한 작품"이라고 엄지를 치켜세운 바 있다.
'레이디 두아'는 공개 1주 차 넷플릭스 글로벌 톱10 TV쇼 비영어 부문 3위에 오른 데 이어 2주 차에는 1위를 기록하는 등 눈길을 끌었다.
넷플릭스 시리즈 '레이디 두아'. 김진민 감독 연출. 8부작. 15세 이상 관람가.
한줄평: 화려한 과시 속 비어있는 결핍.스티브 잡스 꿈 꾼 엘리자베스 홈스…12년 만에 드러난 정체
시리즈 '드롭아웃'. 월트디즈니 컴퍼니 제공2017년 7월 엘리자베스 홈스(아만다 사이프리드)의 증언으로 사건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1년 12월 미국 에너지 기업 엔론의 파산으로 엘리자베스 아버지 크리스 홈스(미첼 길)는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는다. 홈스 가족은 이웃이자 생명공학 기업을 운영하는 리처드 퓨즈(윌리엄 H. 메이시)에게 돈을 빌리게 되고, 이는 훗날 홈스와의 악연으로 이어진다.
대통령 장학생으로 스탠퍼드 대학교에 입학한 홈스는 평소 스티브 잡스를 동경하며 여성 CEO를 꿈꾼다. 그는 피 한 방울로 질병을 검사하는 기기를 만들겠다는 목표로 2003년 대학을 중퇴한 뒤, 스타트업 테라노스를 창업한다. 이후 영화 스타워즈(1980) 속 요다의 말을 인용하며 실리콘밸리에서의 도전을 시작한다.
'하거나, 하지 않거나. 시도라는 건 없어.'하지만 제품 개발이 뜻대로 진행되지 않으면서 위기가 찾아온다. 결국 연인이었던 서니 발와니(나빈 앤드류스)까지 투자자로 참여해 테라노스에 합류하게 되고 홈스는 화려한 언변을 앞세워 거액의 투자를 유치하며 사업을 확장해 나간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꿈으로 모인 이들이지만, 기술 구현이 난관에 부딪히자 위기를 넘기기 위한 임시방편에 의존하기 시작한다. 결국 2015년 월스트리트저널의 보도로 직원 500명 규모로 성장한 회사의 실체가 세상에 드러난다.
시리즈 '드롭아웃'. 월트디즈니 컴퍼니 제공작품은 미국 ABC 방송 팟캐스트 '드롭아웃'을 바탕으로, 이른바 실리콘밸리 최대의 사기극으로 불린 사건을 다뤘다. 연출을 맡은 마이클 쇼월터· 프란체스카 그레고리니·에리카 왓슨 감독은 꿈 많은 학생에서 '여성 스티브 잡스'로 불리기까지 점차 욕망에 뒤틀리는 홈스의 변화를 그려낸다.
이 가운데 점차 낮고 단호하게 변해가는 목소리, 스포트라이트에 비친 모습과 달리 내면에서 충돌하는 심리를 통해 홈스라는 인물의 이중적인 면모를 강조하고자 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인 만큼 일부 회차의 전개가 다소 늘어지기도 한다. 그런데도 테라노스라는 존재가 그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짚어내며 서사를 끌고 간다. 실리콘밸리의 의료 신데렐라로 주목받았던 홈스는 결국 징역 11년형을 선고 받으며 사기극의 중심 인물로 전락했다.
훌루·디즈니+ 시리즈 '드롭아웃'. 마이클 쇼월터· 프란체스카 그레고리니·에리카 왓슨 감독 연출. 8부작
한줄평: 진실을 바꾸려던 집착의 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