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다 94년생이거든요" "역시 우리가 젊어 보이나 봐".
대입수능시험이 끝난 7일 밤 9시 40분쯤 서울 영등포 먹자골목.
한구석에 자리 잡은 시끌벅적한 포장마차 안에 도드라지게 진한 화장을 한 여성 4명이 눈에 띄었다.
테이블 위에는 먹다 남은 우동 그릇 사이로 소주병과 음료수가 널브러져 있었다. 옆 테이블에는 이미 다 마신 소주 3병이 줄지어 있었다.
여성가족부 청소년보호중앙점검단 이승열 주무관이 말을 걸었다. "대학수학능력시험 날을 맞아 청소년 일탈행위에 집중단속을 나섰다"며 신분증을 요구하자 그중 한 명이 선뜻 신분증을 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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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증을 확인하고 포장마차를 나서는데도 찜찜한 마음이 가시질 않는다. 쉽게 발을 떼지 못하는 이 주무관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사진이 얼굴과 다르지 않느냐"고 묻자 "김 기자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다시 가서 확인해볼까요?"란 대답이 돌아왔다.
94년생이라던 여성이 건네준 신분증에는 93으로 시작하는 엉뚱한 주민등록번호가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눈치를 보던 다른 한 명은 그제야 "사실 저는 학교를 빨리 들어갔는데…"라고 털어놨다.
함께 집중단속을 벌이며 다른 골목을 돌던 영등포경찰서의 청소년계 형사들이 하나둘씩 포장마차에 들어서자 여학생들보다 가게 주인이 더 당황했다.
"너희들 미성년자 아니라면서! 우리 집 망치라고 누가 시키기라도 했어?".
주민등록증을 잃어버려서 잠시 신분증을 빌렸다, 집 앞이라 깜빡 놓고 왔다는 변명은 5분을 넘기지 못했다.
"너희처럼 몰래 술 마시는 아이들만 10년 넘게 만났어. 슬쩍 봐도 '촉'이 온다".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경찰관의 노련한 질문에 아이들은 고개를 숙인 채 고등학생이라고 실토하기 시작했다.
이날 남의 신분증을 제시했던 이모(18) 양은 "친구들과 술을 마시려던 차에 마침 갖고 있던 아는 언니의 신분증을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면서 "혹시 신분증을 빌려준 사람의 동의를 받아도 처벌되느냐"고 되묻기도 했`다.
이 주무관은 "흔히 다른 사람의 주민등록증을 빌리거나, 칼이나 가위 등을 이용해 신분증을 훼손하고 숫자를 고치는 일을 쉽게 저지른다"며 "엄연히 공문서위조행위로 불법행위이며 처벌받을 수도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하지만 지난 1년 동안 마음을 옥죄어왔던 수능시험이 끝났다는 해방감에 들뜬 고3학생들은 물론, 선배들의 흥겨운 분위기에 덩달아 신이 난 중고등학생들의 거짓 신분증을 이용한 일탈행위는 이날 밤에도 여전히 기승을 부렸다.
실제로 인터넷 포탈 사이트에서 관련 단어를 검색해보면 주민등록증을 위조·변조하는 요령을 알려주거나 신분증을 돈을 받고 팔겠다는 게시글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신분증 거래나 위·변조를 전문으로 삼는 사이트도 있지만, 평범한 인터넷 카페나 블로그에 기습적으로 게시글을 올리고는 댓글이 달리면 다시 삭제하는 경우도 잦다.
한 카페에서는 "쪽지로 메신저 어플리케이션 아이디를 남기면 직거래 혹은 택배로 보내겠다"는가 하면, 다른 블로그에는 "성인신분증 4장에 각각 4만 원이다. 사진 모두 안경을 썼으니 참고하라"며 안내하는 글을 볼 수 있었다.
경찰은 수능 이후 청소년 유해환경을 집중 단속하는 한편, 주민등록증 위·변조 사이트를 찾아 폐쇄하는 등 강력히 대처한다는 방침이다.
이날도 경찰은 영등포역 주변을 비롯해 강남·신촌·노원역 일대 등 번화가 지역에서 청소년 비행 예방·단속 활동을 벌였다.
또 다음달 12일까지 여가부나 교육 당국·자치단체·시민단체 등과 협조해 장소를 바꿔가며 집중 단속을 이어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