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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먹이‧임산부도 죽였다…제주4‧3 아동학살 '참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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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 짓밟힌 꽃망울 ①]
희생자 10명 중 2명 '아동‧청소년'
군‧경 '초토화 작전' 때 학살 집중
"4‧3의 비인간적 야만성 드러내"

70여 년 전 제주 4‧3 당시 군‧경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만 1만4천여 명. 이 중에는 꽃망울조차 피어보지 못한 채 군홧발에 짓밟혀 죽어간 아동‧청소년이 있다. 군‧경은 젖먹이뿐만 아니라 임산부에게도 총구를 들이댔다. 제주CBS는 그동안 역사의 어둠 속에 묻혔던 이들의 비극을 조명한다. 29일은 첫 순서로 전반적인 학살 실태를 전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젖먹이‧임산부도 죽였다…제주4‧3 아동학살 '참극'
(계속)


제주4·3평화공원 안에 설치된 <비설>. 4·3 당시 희생된 모녀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고상현 기자

 


'양기열 1세 여 1949. 12. 21 사망'
'김병현의 자1 11세 여 1948. 12. 18 사망'
'김병현의 자2 9세 남 1948. 12. 18 사망'
'김병현의 자3 7세 남 1948. 12. 18 사망'(…)

지난 3일 CBS노컷뉴스 취재진이 확인한 제주4‧3평화공원 내 '각명비'에 적힌 4‧3희생자의 이름, 성별, 당시 나이, 사망 일시다. 희생자 중에는 생후 1년부터 만 6세에 불과한 영‧유아뿐만 아니라 19세 미만의 청소년도 있었다. 부모와 함께 몰살당하거나 '○○○의 자(子)'로 이름조차 없이 희생된 아이들도 눈에 띄었다.

4‧3 당시 아동‧청소년 희생자 규모는 어떻게 될까. 지난해 6월까지 제주도에 신고된 4‧3 희생자는 1만4533명이다. 이 중 9세 이하는 818명, 10~19세는 2535명이다. 전체 희생자의 23%(3353명)가 아동‧청소년이다. 3세까지의 영아는 300여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제주4·3평화공원 내 각명비. 고상현 기자

 

유가족이 직접 신고한 수치가 이 정도이고, 실제 피해 규모는 이보다 더 클 것으로 보인다. 당시 영‧유아는 미처 호적에 올리지 못한 채 희생되거나 온 가족이 몰살당하며 희생자 신고조차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존재조차 '말살' 당했다.

◇방어 능력 없는 아이들, '속수무책' 학살당해

4‧3 당시 아동‧청소년의 희생은 군‧경이 초토화 작전을 벌이던 1948년 1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집중됐다. 이 기간 군‧경은 한라산 중산간 마을 사람을 '빨갱이'로 규정하고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다. 방어 능력이 없는 아이들은 속수무책으로 희생당했다.

실제로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의 경우 4‧3 당시 205명이 희생됐는데, 이 중 20%(41명)가 15세 이하의 아동이다. 집들이 불타며 지금은 '잃어버린 마을'이 된 동광리 '무등이왓' 학살에서 살아남은 홍춘호 할머니(84)는 73년 전 상황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홍 할머니는 당시 11세였다.

"1948년 12월일 거라. 마을 사람덜이 아시날(전날) 죽은 가족들을 묻으려고 하는데, 잠복해 있던 군‧경 토벌대가 덮친 거라. 나중에 우리 아버지가 가보니깐 젖먹이가 어멍신디(어머니한테) 도라졍(매달려) 젖 먹으멍(먹으면서) 죽엉이신 거라(죽어있는 거야)."

지난 5일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 무등이왓 학살 터에서 홍춘호 할머니(84)가 증언하고 있다. 고상현 기자

 

1948년 11월 13일 벌어진 제주시 애월읍 소길리 원동마을 학살 사건에서도 희생자 34명 중에는 어린이들이 있었다. 당시 홀로 살아남은 故 이모(1925년생)씨는 생전에 이렇게 증언했다.

"의붓엄마가 다섯 살 난 남동생을 등에 업고 있었는데, 총을 쏘아 부니깐 탁 엎어져서 당한 거죠. 실탄이 우리 동생 등으로 해서 엄마 머리 위로 날아가 버렸어요. 남동생은 그 자리에서 죽어불고(죽고). 그 당시 어린이들은 부모허고(부모하고) 같이 있다가 총살되면 같이 총살되는 거니까."

◇임신부 나무에 매달아 대검으로 마구 찔러

임산부들의 죽음도 예외는 아니다. 제주시 애월읍 하귀리 '비학동산 학살 사건'이 대표적인 예다. 1948년 12월 10일 토벌대는 주민 36명을 총살하기 전에 고정규 씨의 아내(당시 30대)를 끌어내 옷을 전부 벗긴 뒤 팽나무에 매달았다. 이후 총에 대검을 꽂고 만삭의 몸이었던 여성을 마구 찔렀다.

피난 과정에서 아동들이 전염병과 기아 등으로 죽는 경우도 허다했다. 특히 군‧경에 쫓기는,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공간에서 안타깝게 희생되기도 했다.

지난 17일 취재 과정에서 만난 A 할머니(80)는 한 어머니의 기구한 사연을 전했다. "○○이 마을 사람들과 오름에 곱았다가(숨었다가) 아이가 울어버리니깐 토벌대에 발각된 거라. 정신없이 도망치당 보난(보니깐) 아이가 어서(없어). 토벌대가 죽여분(죽여버린) 모양이라."

지난 7일 서귀포시 강정동 자택 인근에서 만난 정순희 할머니(87)가 4‧3 당시 경찰로부터 전기고문을 당해 지금까지도 손목이 끊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낀다고 토로했다. 고상현 기자.

 

학살에서 살아남더라도 4‧3은 아동‧청소년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모진 고문과 총상으로 평생 후유장애로 고생하거나, 학살의 충격으로 정신적 외상 증후군에 시달린다. 10대의 나이에 수형 생활로 꿈을 저버렸다. 특히 4‧3으로 부모를 잃어 '학살 고아'로 한 맺힌 삶을 살기도 했다. 최근 한 달간 취재진이 만난 생존 피해자들의 얘기다.

◇"갓난아기가 무슨 사상을…무차별 학살 증거"

제주4‧3연구소 허영선 소장은 4‧3 당시 아동‧청소년의 죽음에 대해서 "좌우 이념을 떠나 무차별 학살이 이뤄졌음을 보여주는 극명한 증거"라고 강조했다. 4‧3희생자 10명 중 2명이 아무런 저항 능력이 없는 아동‧청소년에 해당한다는 사실 자체가 4‧3의 '광포성'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도피자 가족으로 낙인찍히면 젖먹이도 빨갱이가 됐어요. 당시 갓난아기, 열 살, 열다섯 살 아동들이 어떤 사상을 가졌겠어요. 그 아이들은 도대체 무슨 죄목으로 그렇게 죽어야 했나요. 이것만 보더라도 4‧3이 비인간적인 야만성을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제주4·3평화공원 안에 설치된 <비설>. 고상현 기자

 

제주4‧3평화공원 안에는 <비설>이라는 조형물이 있다. 초토화 작전 시기인 1949년 1월 제주시 봉개동 거친오름 눈밭에서 故 변병생(당시 25세)씨가 어린 딸(2세)과 함께 희생됐는데, 이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그 주위로는 억울하게 숨진 아이를 위무하듯 제주어 자장가가 적혀 있다.

'웡이자랑 웡이자랑 / 웡이자랑 웡이자랑 /우리아기 자는소리 / 놈으아기 우는소리/ 우리어진이 곤밥먹엉 / 혼저재와줍서 / 웡이자랑 웡이자랑 / 웡이자랑 웡이자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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