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 경기도 안산시에 위치한 '단언고4.16기억교실' 2학년 7반 교실의 모습. 책상마다 노란 장미와 해바라기 등 꽃과 함께 학생들의 얼굴 그림이 들어간 기념 액자가 놓여 있다. 김수정 수습기자"제가 그때(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2014년) 초등학생이었거든요. 그때는 (희생자들이) 언니, 오빠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저보다 어리네요."
경기 용인시에 거주하는 대학생 전민영(23)씨처럼 15일 오후 2시쯤
경기 안산시 4.16 민주시민교육원에 마련된 단원고 4.16 기억교실(기억교실)'에는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는 시민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기억교실을 찾은 손정일(44)씨는 "여전히 아이들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익명을 요구한 또 다른 시민은 "책상 하나하나에 한 사람의 인생이 담겨 있다"며 오랫동안 책상 앞을 떠나지 못했다.
먼지 없는 교실 책상 위에는 노란색 장미, 샛노란 해바라기 등 노란 꽃이 놓였다. 그 옆에는 교복을 입은 앳된 얼굴이 액자 안에서 웃고 있었다. '누나, 나 ○○이. 보고 싶다', '얘들아 보고 싶다', '보고 싶어. 언제 와.' 교실 뒤편에 놓인 사물함 위에는 검은색 글씨로 11년째 사라지지 않는 말들이 가득 적혀 있었다.
2014년 세월호 참사로부터 11년이 흘렀지만 유가족들도 여전히 거리에서 만날 수 있다.
사회적 참사 진상 규명·피해자 지원을 위한 참사 대응 시스템이 굳건히 갖춰져 다른 가족이 같은 투쟁과 아픔을 겪지 않았으면 한다는 이들의 소망은 아직도 거리에서 맴돌고 있다. 이들은 시민사회계와 함께 △생명안전기본법 제정 △대통령기록물 공개 등을 요구하고 있다.
CBS노컷뉴스는 세월호 참사 유가족,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로부터 사회적 참사 대응 시스템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 들어봤다.
생명안전기본법 제정 목소리…"원인 조사, 독립적 기구가 해야"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이 만들어지길 바라는 '생명안전기본법'은 이들 만을 위한 법은 아니다. 지난달 10일 이 법안을 대표발의한 더불어민주당 박주민·용혜인·한창민 의원 등은 의안 원문에서 제안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재난이나 그 밖의 각종 사고의 발생은 직접적인 인적·물적 피해 이외에도 다양한 사회적 부담과 갈등을 유발하고 있음. 현행 재난 및 각종 사고에 관한 주요 법령 만으로는 안전사고 발생으로 인한 직·간접적인 피해를 예방하는 데 한계가 있음."
지난 15일 경기도 안산시 '단원고 4.16기억교실' 기억관 1층에 전시된 노란 리본, 기억 뱃지 등의 기억 물품을 구경하는 시민 손정일(44)씨. 김수정 수습기자한마디로 사회적 참사는 반복되는데, 사고로 인한 직·간접적 피해를 예방하는 '참사 대응 시스템'은 부실하다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 고(故) 지상준 군의 어머니 강지은 씨는 "우리는 언제든 사회적 참사의 당사자가 될 수 있다"며 "이 법은 사고 예방 측면 뿐만 아니라 사고를 수습하는 과정에 대한 규정도 많기 때문에 꼭 세월호 참사 유가족 만을 위한 법이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생명안전기본법안의 주요 내용에는
△사고 원인에 대해 '독립적 기구'의 객관적·공정한 조사 보장 △피해자 권리의 구체적 명시 △피해자 지원책 마련 과정에 피해자 의견 반영 △안전권 명시 △해당 지역 공동체 치유책 마련 △피해자 모욕 시 처벌 규정 등이 포함됐다.
유가족들은 '독립적인 사고 조사 기구 구성' 필요성에 대해 입을 모았다. 고(故) 진윤희 양의 어머니인 김순길 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사무처장은 "사회적 재난, 참사가 일어날 때마다 그 사안 별로 특별법을 제정해 조사 기구를 만들어 달라고 요구할 게 아니라, 독립적인 상설 조사 기구가 필요하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강지은 씨 역시 "4·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를 만들기까지의 과정이 참 지난했다"며 "특조위, 사회적참사 특별조사위원회(사참위)가 모두 꾸려진 이후 위원 구성과 관련된 여러 잡음이 발생하는 것을 보며 중립적이고 독립적인 인사로 구성될 필요에 대해 절감했다"고 말했다. '지난한 과정', '잡음'이라는 표현으로 압축됐지만, 유가족들에게는 깊은 아픔을 남긴 그 현실을 다른 이는 마주하지 않았으면 한다는 얘기다.
"지원책 마련시 피해자 의견 반영해야"…2차 가해에 대한 처벌 규정도
생명안전기본법안에는 피해자 지원 과정에서 피해자의 목소리가 반영돼야 한다는 원칙도 있다.
제16조에 따르면 국가는 피해자, 피해 지역에 대해 지원책을 설계할 때 피해자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 배·보상 등의 과정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과정에서 국가는 구제 절차와 피해 입증을 위한 자료 등의 정보를 피해자에게 제공해야 한다.
지난 15일 경기도 안산시 '단원고 4.16기억교실'의 2학년 6반 고(故) 이태민 군 책상 위에 호텔 요리사가 꿈이었던 태민 군을 위해 어머니 문연옥씨가 직접 만든 요리사 모형이 놓여 있는 모습. 김수정 수습기자고(故) 이태민 군의 어머니인 문연옥씨는 "피해 당사자의 목소리가 제대로 담기지 않아 '수박 겉 핥기식' 지원이 이뤄져 왔다"며 "(의료비 진료 지원책이) 통과될 때 정부랑 실랑이를 많이 해야 했다"고 회상했다. 이어 "세월호 참사 당시 학생들을 구조하기 위해 투입됐던 잠수사들이 트라우마에 대해 충분한 진료 지원을 받지 못한 것도 정부가 피해 당사자들의 요구 사항을 충실하지 반영하지 못한 탓"이라고 지적했다.
법안에는 피해자에 대한 모욕이나 정보 유출 같은 2차 가해에 대한 처벌 조항도 있다. 강지은 씨는 "최근 유가족들이 국가와 청해진해운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받은 배상금 일부를 청소년들에게 장학금으로 전달했고, 해당 내용이 기사화됐는데 댓글에서 '그 많은 돈을 받고서 이렇게밖에 못 하냐'는 내용을 봤다"며 "11년이 지났지만 '세금도둑' 등 아직도 유가족들을 좋지 않게 보는 세력들이 있는데 유가족이 직접 모니터링해서 일일이 대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 이남훈씨의 어머니 박영수씨 역시 "어떤 시민은 '다 끝났지 않았냐. 지원 많이 받지 않았느냐'고 하신다"며 "금쪽같은 새끼를 보낸 상태인데 2차 가해성 댓글을 보면 정말 괴롭다"고 했다.
생명안전기본법안은 지난달 10일 발의된 이후로 한 달이 넘게 계류 상태다. 법안 소관 상임위원회인 행정안전위원회에서 제대로 논의조차 시작되지 못했다.
"박근혜 7시간' 관련 대통령기록물 공개해라"…11년간 외침
유가족들의 또 다른 요구 사항은 참사와 관련된 대통령기록물 공개다.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와 4월16일의약속국민연대, 투명사회를위한정보공개센터(정보공개센터)는 15일 오전 서울시의회 본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참사 당시 박근혜 전 대통령의 행적을 담은 대통령기록물에 대해 정보공개 청구를 진행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대통령기록물은 단순히 박 전 대통령의 동선을 넘어서 대통령 비서실·경호실·국가안보실에서 생산하거나 접수한 모든 관련 문서와 전자기록, 녹취 자료, 그리고 박 전 대통령이 청와대 내부와 각 부처에 내린 지시 사항의 전달 경로에 대한 문서까지 포함한다"며 "(이 기록물을 공개하는 것은) 정부의 위기 대응 시스템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했는지 점검하고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라고 밝혔다.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와 4월16일의약속국민연대, 투명사회를위한정보공개센터(정보공개센터)는 지난 15일 오전 서울시의회 본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주보배 기자검찰이 세월호 침몰 당시 박근혜 전 대통령의 행적에 대한 수사 결과를 내놓았지만 이들은 "정식 기록물을 확인한 결과는 아니다"라는 입장이다.
정보공개센터는 "물론 검찰 조사 결과를 어느 정도 신뢰할 수 있겠지만 검찰 수사 결과는 관계자 증언이나 관련인 수사 등을 통해서 나온 것이지 공개된 대통령기록물을 통해 확인한 내용은 아니다"라며 "올해 1월 대법원이 대통령기록물 지정 행위가 사법 심사의 대상이 된다는 판결을 내렸기에 이미 대통령기록물로 지정된 문서도 공개하라는 것이 요구 사항"이라고 설명했다.
이들은 국회와 정부에 대통령기록물 관련 기록물법을 개정하고 10·29 이태원참사, 12·3 비상계엄에 대해서도 기록을 공개하라고 촉구했다. 이들 단체는 "헌법 파괴, 내란 등으로 파면된 대통령의 기록물을 정상적으로 임기를 마친 대통령의 기록물과 동일하게 보호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며 "대통령기록물 지정 권한 남용을 방지하는 대통령기록물법 개정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16일 세월호 참사 11주기를 맞아 4.16연대는 전국 각지에서 추모·기억 행사를 연다. 오후 3시 안산 단원고등학교에서 가까운 화랑유원지와, 세월호 선체가 인양됐던 목포신항에서는 '세월호 참사 11주기 기억식'이 동시에 열린다. 행사에는 유가족들도 참여할 예정이다. 또한 서울 중구 서울시의회 앞에 마련된 세월호 기억공간에서 오후 4시 16분부터 '시민기억식'이 진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