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천=황진환 기자흔히들 선거를 자연현상에 빗대어 설명한다. 바람이 대표적이다. 심판론이 역대급 태풍이 되기도하고, 갑자기 뜨는 주자가 돌풍의 주역이 되기도 한다. 정책과 비전으로 희망을 주면 순풍을 타기도 하지만 시대정신을 거스르거나 예기치 않은 계기를 만나면 민심의 역풍을 맞는 경우도 허다하다.
태풍의 에너지원은 온도와 습도가 제공한다. 따뜻한 바닷물이 열과 수증기를 상승시켜 저기압을 형성하고 이로 인해 거대한 공기의 흐름을 만들기 때문이다. 지난 60년간 바다가 흡수한 열용량이 히로시마 원자폭탄 44억개를 한꺼번에 터뜨린 것과 맞먹는다고 하니 태풍의 에너지원은 실로 막대하다.
선거를 승리로 이끌어줄 바람에도 적지 않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대표적인 동력은 시대정신과 명분, 확장성이 아닐까? 이 흐름을 제대로 탄다면 순풍에 돛 단 듯이 선거를 주도하겠지만 뜨뜻미지근하면 미풍, 거스른다면 역풍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특히 시대정신과 명분을 전제로 확장성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후보단일화가 성사된다면 선거판세를 뒤흔드는 단일화 태풍도 충분히 가능하다.
현대 정치사에서 DJP연합과 노무현-정몽준 단일화는 대표적인 성공사례로 꼽힌다. 1997년의 DJP연합은 각각 호남과 충청을 대표하는 김대중, 김종필 두 지역 맹주가 손을 잡고 헌정사상 처음으로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뤄냈다는 점에서 역사의 획을 그었다. 2002년 노무현-정몽준 단일화는 비록 이미 뽑은 후보를 흔드는 후단협의 해당행위에서 비롯됐지만 결과적으로 노무현 후보의 대선승리 요인으로 작용했다.
단일화의 성패는 명분과 절차적 정당성은 물론 각 후보들이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정치적 기반을 보유했는지 여부에 달려있다. DJP연합은 지역적 기반의 확장을 토대로 김대중 후보에 덧씌워진 '빨간딱지'를 떼어내는 효과를 발휘했다. 노무현-정몽준 단일화는 세대와 계층, 이슈를 기반으로 중도확장성을 극대화했는데, 대선 하루 전날 벌어진 단일화 철회 파문은 역설적이게도 노무현 바람을 강화시켜 지지층 결집을 불렀다.
국민의힘 김문수 대선 후보(왼쪽)와 무소속 한덕수 대선 예비후보. 연합뉴스
21대 대통령 선거를 4주 남짓 앞두고 국민의힘도 김문수-한덕수 단일화를 통해 뒤집기를 모색하고 있다. 다만 단일화의 시기와 주도권을 둘러싸고 당이 심각한 내분에 휩싸여서 한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안갯속이다. 국민의힘은 '경선 때 약속한대로 즉각 단일화에 나서라'고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고 김문수 후보는 6일 "당 대선후보를 끌어내리려 한다"고 반발하며 일정 중단을 선언했다.
국민의힘이 겪고 있는 내홍은 당이 절차와 명분을 무시한 채 속도전에 나서는 이른바 '닥치고 단일화'를 추진하는데 따른 필연적 결과다. 김문수 후보가 당 사무총장 교체를 추진하며 시간끌기에 나선 것은 단일화 주도권을 쥐겠다는 의도로 읽힌다. 권영세 비상대책위원장은 후보등록 마감일인 11일을 단일화 시한으로 못박고 7일, 전 당원을 대상으로 단일화 찬반 여론조사를 실시하기로 했다. 8~11일 전국위원회와 전당대회를 각각 소집한 것은 김 후보에 대한 극약처방까지 암시하는 압박수단의 일종이다.
대선이 한 달도 남지 않은 시점에 후보간 기싸움도 아닌, 정당 내부에서 자중지란이 벌어진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이런 식이라면 어떤 방향으로 단일화가 되든 바람을 기대하긴 쉽지 않다. 건전한 보수층에서조차 국민의힘의 대선 전략은 애초부터 방향을 잘못 잡았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지 않은가. 대통령 파면으로 조기대선이 치러지는데도 탄핵의 강을 건너기는커녕 반탄후보끼리 경쟁하고 있는 모양새가 선거문법을 파괴한다. 윤석열 정부 내각에 몸담았던 반탄후보간 합종연횡은 지지층이 중첩해 별다른 시너지를 기대하기도 힘들다.
국민의힘 권성동 원내대표와 김기현·박덕흠 의원이 6일 후보 단일화 압박에 반발하며 후보 일정을 중단하고 상경한 김문수 대선 후보를 만나기 위해 서울 관악구 김 후보의 자택 앞에서 기다리다 김 후보가 오지 않자 자리를 떠나며 입장을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친윤의 지지를 업고 당선된 뒤 태도를 바꾼 김문수 후보나, 어려운 절차를 거친 자기 당 후보에게 단일화의 주도권조차 주지 않으려는 당이나, 대선 막판 담판으로 무임승차하려는 한덕수 후보 모두 명분과 시대정신에서 민심과 동떨어져있다. 단일화는 사람과 사람의 단일화 이전에 정책과 비전의 단일화가 선행돼야 하는데 두 후보가 내세우는 단일화의 명분은 '반 이재명' 뿐이다.
우리는 윤석열 정부 2년 반을 통해서 묻지마 영입을 통한 외부수혈의 실패를 뼈저리게 경험했다. 국민의힘이 또다시 특정계파 주도로 계엄작전하듯 단일화를 시도하며 정치공학에 매달리고 있다. 보수진영에서조차 이번 대선을 '윤석열 잔존세력에 대한 심판'이 될지 모른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이 변화를 거부하는 화석화된 정당에 머문다면 태풍과 역풍 중 어떤 바람이 불지 자명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