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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조선소에서 희망텐트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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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굴뚝신문]

'굴뚝신문' 발행위원회 제공'굴뚝신문' 발행위원회 제공12·3 내란은 한국 (상업)영화가 즐겨 찾는 소재인 비릿한 권력과 암투를 다룬 영화들을 떠올리게 했다. 그렇지만 나에게 그날부터 파면 이후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이 영화의 주인공은 윤석열과 정치인들이 아닌, 낮에는 광장을, 밤에는 농성장을 지킨 말벌 동지들이다. 그리고 이 영화의 색감은 암청색이 아닌 무지갯빛이다.

내가 경험한 영화적인 순간들을 나누고 싶다. 세종호텔 앞, 연대가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는 브라스밴드인 캄캄밴드의 연대 공연에서 만난 할아버지. 그는 동묘에서 노점상을 하며 틈틈이 시를 쓰는데, 그날은 3·8 여성의 날에 쓴 시를 낭독했다. 여성 해방 없이 노동 해방 없다! 그리고 공연 내내 나에게 곡명을 물어보고 신문지에 빼곡히 적었다. '핑..크..팬..더..오..에..스..티.' 집에 가서 공부하려고 적는다고 했다. 공연이 끝나자 고진수 동지가 확성기에 대고 소감을 말했다. "지금 떠오르는 영화가 있습니다. 타이타닉… 침몰하는 배 위의 연주자들처럼, 윤석열이 석방한 이때…" 그럼 우리가 침몰 중이란 말인가! 섬뜩한 농담에 우리는 파하학 웃음을 터뜨렸고, 시인은 그 순간에도 부지런히 뭔가를 썼다.

투쟁사업장 오픈 마이크가 있었던 어느 날의 광화문은 블랙 코미디 같았다. 가장자리에 흩어져 있다가 광장이 열리자 서로를 발견하고 연루된 사람들이 거기 모여 있었다. 해고 노동자, 성소수자, 비국민으로서 자기 삶을 이야기했다. 후드티, 노조 조끼, 무지개 깃발이나 담요를 두른 그들 곁을 지나 농성 천막들을 따라 걷는데 어느 구간부터 길 위의 모든 사람이 슈트를 입고 있었다. 멀끔한 차림으로 악수하고 담소하고 사진을 찍고 있었다. 전혀 다른 시공간이 붙어 있었다. 여기서라도 들리기 위해 외치는 사람들의 울퉁불퉁한 세계와 여기서조차 가장 잘 보이는 자리를 차지하고도 듣지 않는 사람들의 매끄러운 세계가.

구미의 옵티칼 희망버스에는 계획되지 않은 클라이맥스가 있었다. "고공에도 봄이 오길" 바라며 다 같이 불탄 공장의 외벽에 꽃 스티커를 붙였다. 팔을 아무리 길게 뻗고 점프를 해도 꽃이 9m 높이의 옥상에 닿을 순 없었다. 그러다 누군가, 깃대 끝에 스티커를 붙여 높이 들었다. 사람들이 아래에서 그의 몸을 받치고, 팔을, 깃대를 최대한 높이 올렸다. 초조하게 깃대 끝을 보다가, 와! 하는 함성이 터졌다. 우리가 보낸 봄이 도착한 것이다.

광장에는 '스타워즈 저항군'처럼 덕질로 탄생한 깃발들이 많다. 영화나 만화, 소설을 보고 '세상은 어때야 한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그곳에 나와 현실의 세계를 다시 만드는 것이다. 창작자들은 그 믿음에 어떻게 답해야 할까? 2012년에는 한진중공업으로 향한 '영화인 희망버스'가 있었다고 들었다. 이 산업의 주변부에 있는 내 좁은 경험으로는, 2025년의 영화인들이 우리 이름을 건 희망버스를 탄 광경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2012년의 나는 희망버스에 없었다. 그 마음이 바뀌어 이번에 그 초대에 응한 것은, 말벌 동지들에게 배운 게 있기 때문이다. "내가 뭐라고"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 한화빌딩 앞의 무지개 조선소, 세종호텔, 옵티칼 희망뚜벅이에서 만난 그들은 타인의 투쟁을 기꺼이 남의 일이 아닌 나의 일로 만들었다. 그들이 만든 영화 같은 순간들이 나를 희망버스로 불렀다. 이번에는 뒤늦게 이곳에 도착한 내가 주제넘음을 무릅쓰고 동료들을 부르고 싶다. 여기서 우리 영화가 상상하지 못한 장면들을 보자고. 일터의 동료들, 광장의 동지가 됩시다!

*이 칼럼은 한국옵티칼하이테크 박정혜 여성노동자의 고공농성 500일, 세종호텔 고진수 98일, 한화오션 김형수 68일을 맞아 제작된 <굴뚝신문>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굴뚝신문> 제작에는 고공농성 해결을 촉구하는 14개 언론사 현직 노동기자들과 사진작가, 교수, 노동운동가들이 참여했습니다. ☞ <굴뚝신문> 구매 https://url.kr/wlcun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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