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서울 강북구 미아사거리역 인근에서 국민의힘 선거사무원들이 유세차량 앞에 손팻말을 들고 서 있다. 김수정 기자"수고한다고 박카스 같은 걸 줘도 무서우니까 못 마시는 거예요."서울 지하철 4호선 미아사거리역에서 퇴근길 인사를 하고 있던 국민의힘 선거사무원 윤모씨는 최근 유세 현장에서 위험한 상황이 자주 일어난다고 토로했다. 그는 "유세 현장에 돌아다니면 '시끄러워 죽겠네, XX' 등 욕설이나 악담을 듣는 것은 일상이고 물리적 위협을 느끼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선거사무원 사이에선 '선의로 주는 음료수조차 함부로 먹지 말라'는 이야기까지 나돌고 있다. 상대를 적대시하는 일부 극렬 지지층에 더해 부정선거 음모론을 주장하는 이들까지 합세하며 선거 사무 현장의 혼란은 극에 달하고 있다.
30일 CBS노컷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전날 오후 6시, 서울 서초구 방배 3동 사전투표소에선 황교안 후보 측 참관인이 투표함을 정리하는 과정을 영상으로 촬영하고, 자신이 가져온 유성펜으로 투표함을 훼손하는 일이 벌어졌다. 모두 공직선거법 위반이다.
(관련기사: [단독]'부정선거 음모론' 황교안 측 참관인, 투표함 훼손…"고발 예정")선거사무원을 향한 위협은 그야말로 일상이 됐다. 5대 선거범죄 중 하나인 선거폭력 범죄도 전국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 23일 기준 선거폭력 사범만 42명이 붙잡혔다.
이를 두고 12·3 내란 국면 등을 거치며 전국적으로 과열된 정치 분위기가 식지 않은 상황에서, 곧장 대선이 열리며 극렬 지지층을 중심으로 한 정치 폭력 현상이 극심해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혼자 다니지 말라' 지침까지…불안한 선거운동원들
선거사무원은 공직선거법 제135조에 근거해 선거사무소와 선거연락소에서 근무하며 수당을 지급받는 선거사무 관계자들을 일컫는다. 선거사무원 중에는 일선 현장에서 출퇴근길 인사, 점심시간 유세 등 선거운동을 하는 이들도 있다.
CBS노컷뉴스 취재진이 만난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 관계자들은 위협 상황에 대비한 지침까지 받은 상태였다. 구체적으로 '혼자 다니지 말 것', '위협적인 일이 발생하면 경찰에 신고할 것', '충돌을 최대한 피할 것' 등의 안내 지침이 내려졌다고 한다.
하지만 현장 상황과 동 떨어진 조치라는 말이 많다. 민주당 소속 보좌진 A씨는 "최소 2인 1조로 구성해서 다니게 하는데, 상황에 따라 혼자 있는 경우도 있을 수밖에 없다"며 "인력이 부족하다 보니 어려움이 많다"고 말했다. 욕설이나 물리적 위협 등에 대해서도 A씨는 "선거사무원들에게 경찰에 신고하라고 안내하지만, 실제 상황에선 (폭력을 가한 사람을) 붙잡고 있어야 하는데 그것도 무섭고 쉽지 않다고 말한다"고 전했다.
29일 서울 용산역 근처 횡단보도 앞에서 더불어민주당 선거사무원들이 점심시간 선거유세를 하고 있다. 김지은 기자전날 용산역 근처에서 유세를 하고 있던 민주당 선거사무원들도 "그런 일을 겪지 않도록 미리미리 조심하고 있다"고 말했다. 욕설이나 모욕적인 말을 들어도 그저 상황을 회피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국민의힘 선거사무원 이모씨는 "당에서도 최대한 (위험 상황을) 피해 달라는 지침이 있었다"며 "결국 참고 넘기는 것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특히 선거유세를 하는 선거사무원들 대부분이 단기 아르바이트 형식으로 일하는 중년 여성들이어서 예상할 수 없는 위협에 더욱 취약하다는 의견도 있다. 이씨는 "이틀 전 한 여성 선거사무원이 혼자 지하철역에 있었는데 '집에 가서 밥이나 할 것이지 왜 여기 있느냐'라는 모욕적인 말을 듣고 울기도 했다"고 말했다.
서로가 서로를 악마화…"정치인이 그러니 일부 유권자가 따라해"
앞서 만난 민주당 소속 보좌진 A씨는 현재 상황에 대해 "서로를 너무 적대시하고 악마화하듯이 흘러가고 있어 더 그런 것 같다"고 했다. 국민의힘 선거사무원 이씨도 "저번 총선이랑 비교해 보면 양쪽 다 극으로 가 있다는 느낌을 더 받는다"며 "(위협이 더 심해진 게) 피부로 와닿는다"고 말했다.
실제로 선거운동 시작일이었던 지난 12일 서울 강북구 수유역 인근에서 민주당 선거사무원에게 발길질을 시도하며 선거운동을 방해한 혐의로 70대 남성이 입건됐다. 지난 15일에는 부산 다대포해수욕장역 주변에서 선거운동을 하던 국민의힘 관계자 B씨를 폭행한 혐의로 60대 남성이 구속됐다. 대구 수성구 신매시장 인근 도로에서는 차량을 이용해 민주당 선거사무원들을 폭행한 20대 남성이 긴급체포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이런 현상을 두고 내란과 탄핵 국면을 거치며 상대를 적대시했던 분위기가 선거 국면까지 이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성균관대 사회학과 구정우 교수는 "조기 대선 이전에 탄핵 찬성·반대를 둘러싸고 상당한 갈등이 있었다"며 "그 흥분이 채 가라앉기 전에 대선이 시작돼 감정적인 앙금이나 양극화 측면이 선거 운동 과정에 많이 표출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치권이 상대를 악마화하는 선거 전략을 사용해 온 탓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서강대 사회학과 전상진 교수는 "상대를 악마화하는 전략이 지속적으로 사용된 결과 서부지법 폭동 사태처럼 우리가 하는 일은 그게 폭력일지라도 정당하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특정 정치인을 공격하고 싶은 생각이 이들보다 만만한 선거사무원은 때려도 된다는 생각으로 이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용인대 최창렬 특임교수도 "정치인들이 상대를 악마화하고 적대시하다 보니 유권자들이 따라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구 교수는 "정치권에서 선거운동 자체가 상대 진영을 비방하거나 정치적인 대결로 격화하지 않도록 자중해야 한다"며 "또 선거 사범에 대한 형량을 강화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