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열린 중국 항일전쟁 승리 80주년 기념 열병식. 신화통신 홈페이지 캡처중국이 항일전쟁 승리 80주년(전승절)을 맞아 26개국 정상들을 베이징에 집결시켰다. '친중' 정상들을 대규모로 안방에 초대해 세를 과시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이번 기회에 '반미·반서방' 연대 좌장으로서의 입지를 확실히 다졌다.
중국 전승절 기념 행사가 지난 4일 모두 마무리됐다. 이번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3일 열린 열병식으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등 초대된 정상들이 톈안만 망루에 올라 중국이 자국의 국방력을 뽐내는 장면을 지켜봤다.
북러는 물론 이번에 정상이 초대된 국가들은 대부분 친중으로 분류되는 국가들이다. 동시에 미국과 유럽연합(EU), 한국, 일본 등 선진국들을 중심으로 한 서방진영과 대비되는 글로벌사우스(주로 남반구에 위치한 신흥국과 개도국을 통칭) 국가들이다.
취임 초부터 일대일로(一帶一路) 사업을 통해 글로벌사우스 국가들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꾸준히 모색해온 시 주석은 최근 몇년 사이 미국과의 패권경쟁이 보다 격화되면서 글로벌사우스 국가들을 우호세력으로 끌어들이는데 부쩍 더 공을 들이고 있다.
동시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재등장 이후 미국이 전세계를 상대로 관세전쟁을 벌이며 신흥국·개도국들을 경제적으로 압박하고 있는 상황이라는 점에서 시 주석이 이들 국가들을 포섭하기 보다 수월한 환경이 만들어졌다.
그 결과가 바로 글로벌사우스 국가 정상들의 이번 중국 전승절 행사 대거 참석이다. 톈안먼 망루에서 시 주석을 중심으로 이들 국가 정상들이 쭉 도열해 열병식을 지켜보는 장면 그 자체만으로도 '반미·반서방' 연대의 세를 확인할 수 있었다.
시 주석은 열병식 연설에서 "인류는 다시 평화와 전쟁, 대화와 대결, 상생과 실익 없는 경쟁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면서 평등한 대우와 화합을 강조했다. 이는 다분히 미국 우선주의와 일방주의를 비판한 것으로 풀이된다.
뉴욕타임스(NYT)는 이번 전승절이 중국과 서방 사이의 갈등을 보여준다면서 "주요 서방 민주주의 국가의 고위 대표들은 눈에 띄게 불참했지만 동남아와 중앙아 여러 국가 지도자들이 참석해 중국이 지역 파트너십 강화에 얼마나 성공했는지를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브루킹스연구소의 라이언 하스 중국센터장은 "시진핑은 중국을 세계의 중심 강대국으로 인정받고 자국이 원하는 방향으로 국제 시스템을 개편하겠단 의지를 보이고 있다"면서 "그는 다른 정상들이 열병식에 참석한 것을 이런 목표를 향한 의미 있는 진전으로 여긴다"고 짚었다.
다만, 시 주석이 구상하는 '반미·반서방' 연대는 선진국 중심의 국제경제 질서에 맞서는 신흥국·개도국간 단결과 협력의 범주 안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미일이나 나토 등 경제협력을 넘어선 군사·안보동맹으로 확장돼 서방과 군사적으로 대립하는 것은 중국이 바라지 않는다는 뜻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함께 톈안먼 망루로 이동하고 있다. 신화통신 홈페이지 캡처
대표적으로 전승절 열병식에서 시 주석은 김 위원장, 푸틴 대통령과 나란히 톈안먼 망루에 올랐는데, 북중러 정상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냉전시대인 1959년 이후 66년 만의 일이다. 따라서 곧바로 '신냉전'의 신호탄이라는 우려가 터져나왔다.
그러나 일각에서 제기된 북중러 정상회담 개최는 불발됐다. 3국 정상이 한 컷에 찍힌 장면이 전세계로 타전되는 것이 하나의 이벤트 성격이라면 정상회담까지 개최되는 것은 3국이 경제를 넘어 군사·안보 분야로까지 협력 범위를 넓힌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열병식 참석을 위해 중국을 찾은 국립외교원 원장 출신 조국혁신당 김준형 의원은 "한미일의 이(공조와 협력) 강도나 밀도에 비해서 북중러는 매우 약한 정도이고, 중국은 특히 3자가 이렇게 결합해서 한미일에 빌미를 주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고 설명했다.
이상숙 국립외교원 교수도 " 안보 협력은 북한과 중국의 오랜 역사를 보면 뿌리 깊은 불신들이 있다"면서 "그래서 중국으로서는 아마 북한과의 안보 협력을 러시아가 원한다고 하더라도 북한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일정한 거리를 두는 모습들을 보일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달 31일 톈진에서 개막한 상하이협력기구(SCO) 정상회의를 시작으로 4일 전승절 행사에 참석한 각국 정상들과의 연쇄 회담까지 쉴틈없이 달려온 시 주석은 오는 8일에는 브릭스(BRICS) 정상 특별 화상회의에 참석해 다시 한번 '반미·반서방' 연대의 좌장 역할을 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