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공항 공항난민 A씨가 5개월 동안 체류했던 김해공항 출국대기실 모습. 사단법인 두루 제공김해공항 첫 '공항난민'이 5개월 만에 입국한 일을 계기로 난민신청자가 처하는 상황과 수년째 제자리걸음 중인 난민 정책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최소한의 인권을 보장할 출국대기소 설치와 정당한 난민 심사 보장 등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톰 행크스 주연 영화 '터미널'은 고국에서 쿠데타가 발생해 미국 입국이 거부되면서, 뉴욕 공항에 발이 묶인 채 생활하는 남성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비슷한 일이 최근 부산 김해국제공항에서 벌어졌다. 서아프리카 기니에서 온 A(30대·남)씨는 김해공항 출국대기실에서 5개월 동안 먹고 자는 '공항난민' 생활을 해야 했다.
A씨는 지난 4월 김해공항에 도착했다. 정치적 박해를 이유로 우리 정부에 난민 신청을 했다. 그러나 법무부가 난민 심사에 회부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면서 입국이 거부됐고, 그의 공항생활은 그렇게 시작됐다.
A씨는 5개월 동안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찜질방 수면실과 같은 공항 내 출국대기실에서 보냈다. 일주일에 단 몇 차례 30분가량 국제선 터미널로 나오는 것이 A씨의 유일한 외출이었다. 식사는 대부분 같은 종류 햄버거로 해결했다.
당시 A씨는 변호인에게 전달한 편지에서 "대기실에 20명이 함께 있을 때도 있고, 혼자 있을 때도 있다"며 "우리는 같은 화장실과 같은 담요를 사용한다. 이 곳에는 사생활이라는 것이 전혀 없다. 그저 버티고 있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이에 이주민 단체 등은 지난달 25일 A씨가 김해공항 출국대기실에서 비인간적인 처우를 받아 인권침해가 발생했다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제출했다.
김해공항 첫 공항난민 A씨가 지난달 13일부터 5일 동안 제공 받은 출국대기실 식사 모습. 이주민 인권을 위한 부울경 공동대책위원회 제공 공항난민의 열악한 처우가 문제가 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2015년 수단과 시리아 등에서 온 공항난민들이 인천공항에서 A씨와 비슷하게 열악한 생활을 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이듬해 인권위는 법무부에 난민 신청자 인권 보장을 위한 처우 개선을 권고했고,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에 법무부는 지난 2023년 출국대기실을 국가운영으로 전환하고 환경을 개선했다고 공표했지만,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주민 단체들은 가장 현실적인 개선책으로 출국대기소 설치를 제안한다. 출국대기소는 난민 신청 등 법적 구제 절차를 밟는 장기 대기 외국인을 위한 공항 밖 거주 시설로, 이미 여러 차례 설치가 시도됐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지난 2022년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의원이 '출국대기소 설치법안'을 발의했지만 계류하다 제21대 국회 회기가 끝나면서 자동 폐기됐다. 법무부도 지난 2023년 인천공항 인근에 장기 출국대기소 신설을 추진한다고 밝혔지만 수년째 진전이 없는 상황이다.
공익법단체 '두루' 홍혜인 변호사는 "현재 공항 출국대기실은 사람이 오래 거주하기에 결코 적합하지 않은 환경으로 구금과 마찬가지"라며 "난민 심사나 소송 과정 중에 장기간 머물 수 있는 공항 밖 별도의 거주시설인 출국대기소를 설치하면 공항에서 장기체류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을 수 있고, 현재 문제되는 비인간적 처우는 대부분 해결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지난달 25일 부산 연제구 국가인권위원회 부산사무소 앞에서 인권단체들이 김해공항 출국대기실 인권침해 진정 기자회견을 열었다. 정혜린 기자여기에 더해 난민신청자에게 정당한 심사 기회를 보장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A씨는 지난 4월 김해공항에 도착해 난민 신청을 했지만, 법무부는 '난민인정심사 불회부결정'을 내렸다. 불회부결정은 출입국 당국이 난민 인정에 대한 본안 심사로 회부하지 않고 종결한다는 의미로, 이 경우 입국이 거부된다. 즉 A씨는 난민 인정 여부를 제대로 심사도 받지 못했다는 뜻이다. 이에 불복한 A씨가 소송을 제기하면서 지난한 공항 생활이 이어졌고, 법무부는 이 소송에서 패소했다.
조국혁신당 박은정 의원실에서 입수한 '출입국항 난민신청 및 회부심사 결과 현황'에 따르면, 난민심사 불회부율은 최근 크게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2022년 38%였던 불회부율은 2023년 71.2%, 지난해 75.3%로 늘었다. 지난해 우리나라 난민신청자 가운데 75.3%가 1주일 동안 진행되는 간이 심사만 받은 뒤 정식 난민심사를 받을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게다가 A씨처럼 불회부결정 취소 소송을 제기해 1심에서 법무부의 결정이 뒤집힌 비율은 최근 5년 사이 62.8%에 달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2020년~2024년 난민인정심사 불회부결정 취소소송 현황'에 따르면, 최근 5년 사이 법무부 불회부 결정 취소 소송에 대한 1심 결과 105건 가운데 66건이 원고인 난민 측이 승소했다.
법무부가 난민 신청에 대해 과도하게 불회부결정을 남발해 정식 난민심사 기회를 박탈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홍 변호사는 "난민신청자들이 난민법에 명시된 대로 정당한 난민 심사를 받을 수 있도록 법무부의 행정 운영이 바뀌어야 한다"며 "더 나아가 다소 모호하게 되어 있는 난민법 시행령의 불회부 사유를 더 명확한 언어로 개정해 억울하게 난민 심사 기회를 박탈당하는 경우가 없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