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이재명 대통령. 연합뉴스한미 양국이 3500억달러 선지급을 놓고 이견을 좁히지 못하는 가운데 정부가 이달 말로 다가온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에서 극적인 대미 관세협상 타결을 노리고 있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투자액 증액과 선불 이행을 거론하며 압박 수위를 높이는 데 대해 이재명 대통령이 "국익에 반하는 결정은 하지 않겠다"고 '버티기 선언'을 하면서 이달 내 타결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전망에 무게가 실린다.
다만 협상 장기화로 우리 기업들의 출혈이 커지고 있고, 이런 교착 상태가 장기화되는 것에 대한 이 대통령의 정무적 부담 역시 커지는 상황이 변수가 될 전망이다.
한미 잠정 합의 후 70일 지났지만 美 압박-韓 버티기 평행선
8일 통상당국 등에 따르면 한미는 지난 7월 미국으로 수입되는 한국산 제품 등에 대한 '상호관세율을 15%'로 잠정 합의했지만, 그후 70일이 지나도록 3500억달러에 달하는 대미(對美) 투자 패키지를 놓고 줄다리기를 이어가고 있다.
잠정합의 이후 우리 정부는 대미 투자 성격에 대해 △대출 지원 △정부 보증 △국내 기업의 미국 내 투자 확대 등을 묶은 금융·투자 조합 패키지로 설명했다. 당장 현금을 투입하는 방식이 아니냐는 지적에는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반면 미국은 잠정합의 이후 대미 투자에 대해 일관되게 현금성 직접 투자(up-front payment) 방식을 거론하고 있다. 여기에 상당 부분을 선지급 형태로 집행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아울러 "일본은 이 안(案)이 좋다고 한다"며 감정적인 압박도 이어갔다.
하지만 정부는 이 대통령을 필두로 "미국의 요구를 수용했다면 탄핵당했을 것"이라며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자동차 업계에 지원금을 주는 방안도 거론되는 등 미국 측에 끌려 다니지 않겠다는 의사 표시만 반복되고 있다.
이에 한국은 통화스와프 체결을 꺼내 들었다. 통화스와프는 두 나라가 서로의 통화를 일정 기간 동안 맞교환하기로 약속하는 국제 금융 계약이다. 한국과 일본의 외환보유액은 각각 약 4천억달러, 1조6천억달러 수준으로 4배 가량 차이가 나는데, 한국은 일본과 같은 외환 완충 장치가 없어서 대규모 직접 대미 투자에 나설 경우 외환 리스크가 커지기 때문이다.
이런 요구에 대해 미국은 뜸을 들이며 지난 1일 환율 정책 투명성 강화 합의만 먼저 체결한 상태다.
양국의 시각 차이가 좁혀지지 않으면서 협상이 교착 국면에 빠진 사이, 한국에 앞서 관세 잠정 합의를 한 일본과 EU는 이미 미국과 합의에 마침표를 찍었다.
미국에서 판매되는 일본산·유럽산 자동차에는 15%의 관세가 부과되지만 한국산 자동차는 여전히 25%의 고율 관세를 감당해야 하는 불리한 처지에 놓여 있다. 국내 완성차 업체들은 관세 인상분을 떠안으며 방어에 나섰지만, 이에 따른 타격은 불가피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日처럼 할 수 없다…합리성이 뭐길래
관세 폭탄이 현실화했지만 이 대통령은 "상업적 합리성을 바탕으로 양국의 이익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논의가 진전되기를 기대한다"며 미국 측의 이익만 일방적으로 반영한 대미 투자 패키지 문제점을 강조하고 있다.
미국은 투자 이익을 한·미가 1대9로 나눌 것을 요구했고, 우리 정부는 원금이 회수될 때까지라도 원금의 90%를 회수하자는 것을 골자로 조율을 시도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일본은 원금이 회수될 때까지는 5대5, 원금 회수 후에는 미국이 이익 90%를 가져가는 것으로 최종 합의한 상태다.
이 대통령이 언급한 상업적 합리성을 놓고 업계에서는 수익 배분 비율 뿐만 아니라 투자처를 어떻게 정하는지도 염두에 둔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이 수익이 나기 어려운 분야에 투자를 요구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크리스 라이트 미 에너지부 장관은 사업성 평가가 끝나지 않은 알래스카 액화천연가스(LNG) 송유관 건설 사업과 관련해 "한·일 등 여러 아시아 기업들과 (사업 참여를) 협의 중"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당초 알래스카산 LNG 구매해달라던 요구에 더해 송유관 건설 프로젝트 참여까지 압박하는 모양새다.
외면하려해도 더 커지는 美 존재감…韓, APEC 앞두고 다시 군불
하지만 한국 경제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과 그 구조를 보면 하루라도 빨리 협상을 마무리 지을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지난해 우리나라 GDP(국내총생산)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36.6%로 지난해 경제성장률 2.04% 중 95%(약 1.93%포인트)를 수출이 담당했다.
관세 협상 교착에 대한 해법으로 정부는 수출 다변화를 언급하고 있지만 지난 10년 동안 미국 의존도는 오히려 심화하고 있다.
9월 수출은 지난해보다 12.7% 증가해 3년6개월 만에 최대치를 기록했지만 대미 수출은 오히려 1.4% 줄었다. 지난해 대미 수출은 387억 달러 규모로, 10년 전보다 12.6%p(203억달러→387억달러) 상승했다. 반면 대중 수출은 줄고 신흥국 수출도 아직까지는 유의미한 성장을 이뤄내지 못했다.
정부 내부에선 강경 전략 수정 분위기도 감지된다. 다음달 말로 예정된 APEC을 계기로 협상 타결 가능성을 다시 띄우고 있는 것이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지난 2일 언론 인터뷰에서 "미국 측에 양해각서(MOU)와 관련한 건설적인 수정 대안을 만들어 보냈지만, 아직 구체적인 답변이 없어 기다리는 중"이라며 "지금이 협상의 분수령"이라고 말했다.
위성락 국가안보실장도 "(전체적인 협상은) 크게 비관적이지는 않다. 다시 (제 궤도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며 "그 시점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APEC 정상회의가 하나의 계기가 될 수 있다"고 궤를 같이 했다.
현실적으로 미국에 의존하는 수출 구조에서 하루아침에 벗어날 수도 없는데다 시간이 흐를 수록 한국 정부의 협상력과 현 정부의 유능함에 물음표가 붙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고려된 것으로 풀이된다.
정상회담에도 관세 협상 마무리 불발…두번째 정상회담선 매듭 지을까
APEC에서 두번째 한미 정상회담이 예상되는 가운데 이 대통령이 직접 나섰는데도 회담 매듭을 짓지 못하는 '워스트 시나리오'가 현실화될 수 있다는 초조함이 읽히는 지점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앞서 대통령실과 정부는 지난 8월 이 대통령의 방미에서 관세 협상은 의제가 아니었고 이는 '전략적 모호성'에 근거한 의도된 결과였다는 취지로 설명했다. 두 정상의 첫 만남이었던 만큼 구체적인 성과가 없더라도 회담 자체에 대한 긍정적인 해석이 이어졌다. 특히 일본과 비교하며 농산물을 개방하지 않은 데 대한 의미 부여에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대통령실이 두번째 회담에서조차 구체적인 결과물을 내놓지 못하면 역공에 직면할 수 있다. 일본 정부는 농민들의 반발을 감수하고 자동차 산업을 지켰는데, 한국 정부는 국내 정치를 의식해 자동차 산업의 희생을 강요하는 게 아니냐는 반론에 설득력이 붙을 수밖에 없다.
한 재계 관계자는 "이 대통령이 지난 9월 뉴욕 방문 시 트럼프 대통령을 피해 다녔다는 농담도 들린다"며 "정부는 APEC에서 타결한다는 걸 목표로 최대한 노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