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용산 대통령실의 외경. 연합뉴스1990년대 후반 국방부를 출입한 적이 있다.
당시만해도 대부분의 정부 부처들이 종이 출입증을 쓰던 때라 청사 정문만 통과하면 건물 내에서는 별다른 제한없이 사무실을 돌며 공무원들을 취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때도 국방부는 달랐다. 용산 국방부 청사 1층에 기자실이 있었고 사무실이 있는 2층 이상으로 가는 것은 엄격히 통제됐다. 보안 이유로 청사 내 이동은 사실상 불가능했고 전화 취재도 쉽지 않았다. 기자들은 그런 국방부를 두고 삼실(三室) 출입처라 불렀다. 기자실과 대변인실, 그리고 화장실만 갈 수 있는 출입처라고 자조했다.
일반 국민들에게도 국방부 건물은 위압감을 주었다. 건물 자체가 높은 지대에 자리잡고 있어 사람들을 내려다 보는 구조다. 정문에는 초병이 부근을 왕래하는 시민들을 24시간 주시했다. 대다수 직원들과 민원인, 그리고 기자들은 근무지원단 쪽 출입문으로 드나들었는데 초병은 물론 육중한 바리케이드까지 설치돼 있어 위압감을 주기는 마찬가지였다. 한마디로 국방부는 소통과는 거리가 먼 공간이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3일 밤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긴급 대국민 특별 담화를 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이런 국방부로 윤석열 전 대통령은 임기를 시작하자마자 집무실을 옮겼다. 청와대는 제왕적 대통령의 상징이니 이 공간을 벗어나 국방부로 집무실을 옮겨 국민과 소통을 원활히 하기 위해서라는 이유였다.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 윤 전 대통령이 용산 집무실 이전 브리핑 때 한 말이다. 인간이 만든 공간이 가치중립적이지 않고 인간의 행동과 사고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공간사회학의 주요 주제다. 공리주의자 제레미 벤담은 판옵티콘 같은 감시가 용이한 공간 설계를 제시했고 미셸 푸코는 이런 감시가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검열을 강화시켜 기존 질서에 순응하게 만든다고 하는 등 공간과 인간 사이의 상호작용을 주장했다.
윤 전 대통령이 국민과의 소통을 위해 국방부로 대통령 집무실을 옮겼지만 국방부는 애초부터 소통과는 거리가 먼 공간이라는 점에서 대통령실 용산 이전은 발상 자체가 모순이었다.
통제와 감시, 복종에 익숙한 국방부 공간에서 윤 전 대통령의 의식은 소통보다는 정치적 반대 세력 제거 쪽으로만 흘렀고 결국 군을 동원해 계엄까지 일으키고 말았다. 그의 말대로 국방부 공간이 그의 의식을 지배해 버린 셈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집무를 시작한 29일 봉황기가 펄럭이고 있다. 윤석열 정부가 용산으로 대통령실을 옮긴 지 3년 7개월 만의 청와대 복귀다. 봉황기는 국가수반을 상징하는 깃발로,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곳에 상시 게양된다. 박종민 기자지난 29일 0시를 기해 기괴했던 국방부와 대통령의 동거가 끝나고 대통령 집무실이 청와대로 돌아갔다.
대통령이 군에 둘러싸인 공간을 벗어난 것만으로도 의미는 있다.
하지만 불통과 제왕적 이미지가 청와대에 남아 있는만큼 이재명 대통령에게는 청와대를 소통과 협치의 공간으로 만들어야 하는 과제도 안게 됐다.
비서진 및 국민들과 물리적 소통을 위한 청와대 공간 배치는 물론 디지털 소통과 현장 방문도 강화해야 한다.
이번 기회에 야당 지도부도 조만간 청와대로 불러 집들이도 한번 해볼 것을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