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이미지 제공약 보름 전 미·중은 정상회담에서 '건설적·전략적 안정 관계'라는 정치적 수사(修辭)를 통해 양국 관계를 더 이상 악화시키지 않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물밑에서 벌어지는 기술 패권 경쟁은 쉽게 멈추지 않을 전망이다.
기술 패권은 비단 경제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첨단 기술을 선점하는 쪽이 전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최대 강국의 지위를 누려온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기술 패권을 유지하는 방법은 첨단 기술에 대한 장악력을 키운 뒤 이를 경쟁국이 확보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냉전시대 소련에 대한 기술 봉쇄에 성공한 미국은 지금까지 글로벌 패권국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제 미국의 타깃은 중국이 됐다. 핵심은 소련에 그랬던 것처럼 중국에 대한 기술 봉쇄가 먹혀들지 여부다. 하지만 냉전 시대와 달라진 환경 속에서 미국이 예전 같은 통제력을 발휘하기는 쉽지 않다는 분석이 많다.
미국이 소련 '기술 봉쇄'에 성공한 이유는
2차 대전 이후 진행된 미국과 소련의 이념·체제 경쟁을 결정지은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는 기술 패권이었다. 미국은 소련의 기술 발전을 촘촘하게 막으면서 산업과 군사 분야의 우위를 유지하려 애썼다. 소련에 대한 기술 우위 유지를 안보 전략의 핵심 축으로 삼은 것은 지금의 미국과 여러 면에서 오버랩된다.
당시 미국은 자국을 포함해 영국, 프랑스 등이 참여한 '코콤(CoCom)'을 동원했다. 1949년 출범한 코콤은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 국가들에 대한 첨단 기술·장비 수출을 공동으로 막기 위해 고안된 다자간 수출통제 기구였다. 여기에서는 전자·컴퓨터·반도체 제조 관련 장비 및 기술을 통제했다. 이들 기술은 민간뿐 아니라 군사용으로도 쓰일 수 있는 것들이다.
미국은 코콤을 통해 봉쇄 그물을 넓게 치는 한편, 미국 차원의 직접적인 기술 통제에도 나섰다. 1980년 카터 대통령령은 "소련으로 가는 고급 기술 및 전략 물자 수출을 전면 재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이후 레이건 정부 때인 1988년 국가안보결정지침(NSDD) 320호를 통해 "소련과 그 동맹국에 대한 전략 기술 이전을 제한하는 정책을 계속 유지한다"고 명했다. 전략 기술에는 고급 전자·컴퓨터·통신 등의 제조·공정 등이 포함됐다.
또 미국이 첨단 산업 분야에서 원천기술을 바탕으로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한 것도 크게 작용했다. 미국은 핵심 전략 기술의 기초 연구를 사실상 독점하다시피 하며 국제 표준을 주도했고, 이를 통해 기술 패권국으로서 국제 질서를 설계할 수 있는 영향력을 확보했다.
결국 기술 봉쇄망을 뚫지 못한 소련은 발전이 정체되면서 기반이 흔들렸고, 글로벌 패권 경쟁에서 탈락했다.
'기술 강국' 된 중국…냉전과 다른 점은
피트 헤그세스 미국 국방장관이 지난달 30일(현지시간) 싱가포르에서 열린 아시아안보회의(샹그릴라 대화)에서 연설하는 모습을 각국 국방장관 등 참석자들이 보고 있다. 연합뉴스미국은 과거의 경험을 거울삼아 이를 중국에 대해서도 그대로 투사하고 있다. 초점은 반도체 기술과 장비에 맞춰졌다. 4차 산업혁명의 중심이 될 인공지능(AI) 산업 분야에서 맹추격하고 있는 중국을 따돌리고 주저앉히기 위해서다.
하지만 냉전 시대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는 점에서 미국의 의도대로 귀결될지는 미지수다.
우선 봉쇄 대상인 소련과 중국은 경제적 위상이 전혀 다르다. 소련은 당시 주류 경제 체제와 동떨어진 고립된 '폐쇄 경제'였지만, 중국은 글로벌 공급망의 핵심에 위치하면서 경제적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
상품 수입을 막거나 전략 물자 수출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상대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카드를 중국도 쥐고 있다.
과거 코콤 시절에는 미국이 동맹국들을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었지만, 지금은 연대가 느슨해졌다. 미국의 제조업이 과거보다 상대적으로 훨씬 약해졌다는 점도 입김을 약화시켰다.
미국과 반도체 동맹을 맺은 네덜란드는 미국의 요구에 따르고 있지만, 내부적으로는 다른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스요르드 스호르츠마 네덜란드 대외무역·개발협력장관은 최근 미국 의회에 제출된 '하드웨어 기술 통제 다자 동조법(MATCH)'에 대해 반대 의견을 피력했다. 이 법안은 동맹국들에게 자국 수준으로 중국에 대한 반도체 제조 장비 수출을 제한하는 내용이다.
스요르드 스요르즈마 네덜란드 대외무역·개발협력장관. 연합뉴스스호르츠마 장관은 "광범위한 제한은 반도체 기업들의 매출과 시장 지위를 해칠 위험이 있다"는 이유를 들었다.
이미 네덜란드는 미국 요구에 따라 중국에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수출을 금지하고 있다. 첨단 반도체 생산에 필수적인 이 장비는 네덜란드의 ASML이 독점 생산하고 있다. 스호르츠마 장관은 오는 7월 중국을 찾아 이 문제를 놓고 논의할 예정이다.
중국이 기술 자립을 가속화하는 점도 미국의 봉쇄 효과를 반감시키고 있다. 중국의 ICT(정보통신기술) 기업인 화웨이는 서방의 장비 없이도 최첨단 반도체를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이 회사는 트랜지스터 밀도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신호 전달 시간을 단축하는 방식을 내세웠다.
베이징대 연구팀은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전자설계자동화(EDA) 프로그램의 실험용 버전을 선보였다. 미국이 소련 때처럼 중국에 대해 완전히 봉쇄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양국의 기술 패권 경쟁이 언제, 어떤 식으로 결론 날지가 국제 질서의 향배를 결정 지을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