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부터 14일까지 서울 마포구 마포아트센터에서 '영희 페스티벌'이 열렸다. 김수정 기자"여성만 나오는 페스티벌을 기획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혹시 (출연) 의향이 있냐고 해서 그게 뭐 고민할 거리나 돼요? 한다 그랬어요, 그냥. 좋아? 나도 좋아. 근데 이게 뭐 그렇게 막 그렇게까지? 당연히 해야지, 당연히. 왜냐하면 거만한 말 좀 할게요. 여자의, 여자에 의한, 여자를 위한 페스티벌을 하는데 내가 아니면 누가 가? 나 아님 누가 가?"'영희 페스티벌' 마지막 날이었던 지난 14일 저녁, 시간 순서상 가장 마지막 무대에 오른 밴드 자우림의 보컬 김윤아가 말했다. 옛 교과서에서 만난 여성의 이름 '영희'에게 '영광'(榮)과 '기쁨'(喜)을 부여한, 여성 창작자가 끊임없이 나오는, 음악·문학·코미디·담론·전시를 아우르는 '영희 페스티벌'에 나오는 것은 "고민할 거리"도 되지 않았다고.
㈜마포문화재단이 주최하고 유어썸머가 주관하며, 내년 데뷔 20주년을 앞둔 싱어송라이터 오지은이 기획한 영희 페스티벌은 지난 12일 전야제를 시작으로 13~14일 주말 이틀 동안 서울 마포구 마포아트센터 아트홀 맥·플레이 맥·갤러리 맥에서 열렸다. 1997년 미국에서 시작한 여성 뮤지션 중심의 페스티벌 '릴리스 페어'(Lilith Fair)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종합 축제다.
김뜻돌, 김사월, 김윤아, 김진아, 나인, 남메아리, 드링킹소년소녀합창단, 박소은, 선우정아, 수조, 안다영, 안신애, 예람, 오소영, 오지은, 요조, 우희준, 윤새, 이랑, 이상은, 이설아, 이아립, 정새벽, 정우, 조소정, 청요일, 해파, ddbb, sunwashere, THE FIX가 공연자로 나섰다. 작가 논센소의 전시는 갤러리 맥에서 페스티벌 기간 내내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싱어송라이터 오지은이 기획자로 나선 이번 '영희 페스티벌'은 음악·문학·코미디·담론·전시 등을 아우르는 종합 페스티벌이다. 김수정 기자음악가 김사월의 '김사월쇼 만들기', 코미디언 김서연·원소윤·최예나 '영희희희', 작가 김소영 '그림책이라는 황홀한 세계', 작가 김지승의 '영희라는 이름과 호명의 역설', 만화가 들개이빨과 작가 최지은의 '우리가 여성뮤지션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 팟캐스터 비혼세와 셀럽맷의 '팟캐스터네츠', 싱어송라이터 오지은과 요조, 작가 이다혜의 '홍대여신과 홍대마녀, 이면에 있던 것', 뮤지션 안다영·오지은·우희준·이아립·해파와 작가 이다혜가 함께하는 뮤지션 라운드 테이블, 영화 '첫여름' 감독 허가영의 GV, 음악가 잔디(브로콜리너마저)의 '인디밴드 살림 살기', 정성은과 굉장한 여자들의 '영희야, 스탠드업 코미디야' 등 프로그램도 풍성했다.
음악가를 비롯해 각자의 고유한 예술을 하는 다채로운 '여성 창작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페스티벌은 국내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사례다. 대중음악계를 비롯해 이른바 '문화 소비층'으로서 여성의 위치가 굳건함에도 정작 여성 창작자가 '무대의 정점'(메인 스테이지)에 오를 기회는 의아하리만치 주어지지 않았고, 그렇기에 만들어진 이 페스티벌의 궁극적인 목표는 '소멸'이라 할 수 있다.
제일 눈부신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헤드라이너가 아니더라도, 무대 자체에 오르는 것도 쉽지 않았던 여성 창작자들은 '영희 페스티벌'에 함께하게 돼 느끼는 벅참을 대개 숨기지 않았다. 남메아리는 지난 12일 열린 전야제의 첫 무대를 여는 것을 "너무 큰 영광"이라고 표현했고, 그다음 주자였던 이랑은 "더 많은 여성 창작자들이 무대에 오르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어서" 활동 중인 여성 싱어송라이터를 아카펠라 인원으로 초대했고, 한 명 한 명씩 이름을 말하도록 자리를 마련했다.
전야제의 마지막을 맡은 선우정아는 "'영희 페스티벌'은 내내 너무나 다채롭고 예상할 수 없고 그런 재미로 가득할 것이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라며 "굉장히 재밌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이어 "뭐 여러 가지 일들이 벌어지겠지만 처음이니까… 하지만 그것이 다 즐겁고 기쁨으로 승화될 수 있는 그런 날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라고 전했다. 그 또한 친구이자 비브라폰 연주자인 마더바이브와 함께 무대를 꾸몄다.
김사월이 지난 13일 저녁 공연을 하는 모습. 김사월 밴드는 전원 여성으로 구성돼 있다. 김수정 기자13일 저녁 무대에 선 김사월은 "페스티벌에서 자신의 모습으로 서는 게 은근 쉽지가 않다. 이렇게 조용한 음악하는 사람들이 이 큰 무대에 서려면 나름의 어떤 압박감 때문에 이렇게 덩치를 키우게 된다"라고 운을 뗐다. 하지만 '영희 페스티벌'에서였기에, 김사월은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저희는 서서히, 서서히 들려드릴게요. 서서히 다가갈게요."
기획자 오지은이 영희 페스티벌 이야기를 꺼냈을 때, 김사월 역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해야겠다'"라는 마음이었다. "많은 여자 음악가들이 너무나 바라던 소식"이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두려웠다. '세상에 이런 여자 사랑 판이 없었기 때문에 나에게 기회가 없었던 건데, 실제로 이런 판이 벌어졌는데 내가 사랑받지 못하면 어떡하지?' 하고 생각해서다.
"그래서 여자 음악가, 여자 예술가를 혼자 두면 안 된다는 거예요. 혼자 두면 이런 생각을 하거든요. 아마 이 판의 많은 향유자분들이 자기 예술하는 분들도 많잖아요? 공감하실 수도 있는데… '어, 잘 안되면 내가 부족해서, 잘 되면 이건 거품' 이런 식으로 생각하기가 쉬워집니다. 그래서 그냥, 오늘 이렇게 서로 좋아해 준 것처럼, 오늘처럼 앞으로도 서로를 좋아했으면 좋겠어요." "이런 페스티벌이 진작 생겼어야 했는데 이제야 첫 회를 맞이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너무 아름답고 뭉클한 에너지가 가득한 것 같다"라며 "참 어메이징(amazing, 놀라운)한 축제"라고 바라본 나인 역시 오지은의 연락을 받고 '개런티나 조건 같은 건 아무 상관 없으니 무조건 가겠다'라고 답했다. "동시대에 같이 음악을 하고, 같이 고민을 치열하게 해 온 동료 여성 창작자들과 한곳에 모여서 오롯이 저희만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기회가 정말 귀하거든요."
가수 정새벽(왼쪽)이 공연하는 모습. 김수정 기자특히 여성 음악가에게는 어릴 적 음악을 듣고 무대를 보며 꿈을 키우게 해 줬던 '우상'이자 '선배'와 나란히 이름을 올리는 기회이기도 했다. '영희 페스티벌'에서 진행한 요조와 오지은의 대담을 들었다는 김뜻돌은 "제가 청소년기 때 CD로 듣던 뮤지션들이, 이렇게 선배님들이 직접 불러 주시고 또 같은 무대에 설 수 있다는 게 한 15년 만에 뭔가 어떤 제 어렸을 적 꿈이 이루어진 거 같은 느낌도 들었다"라고 밝혔다.
마지막 날 공연자로 나선 김윤아는 "김윤아로서의 김윤아 음악을 할 때 저는 여성인 김윤아가 된다. 저는 여성인 거를 너무나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제가 여성이라 너무 행복하고. 오늘 들려드릴 김윤아의 음악들은 한 명의 '영희'로서의 음악들이다. 그리고 그 문을 열어 줄 완벽한 첫 곡을 첫 곡으로 준비했다"라며 '걸 토크'(girl talk)를 불렀다.
'너의 두 뺨에는 기쁨이 가득하고 너의 눈동자는 서늘한 별빛처럼 푸르게 빛났었지 /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네 모든 향기는 회색이 되고 눈부시던 날카롭던 황홀하던 너는 일상의 건조함 속에 시들어가겠지'라는 '은지'의 가사를 낭독해 관객과 함께 음미하는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은지'를 내년 페스티벌에서 부르겠다는 약속을 남긴 김윤아는 말했다.
"모든 은지와 영희들이 죽는 날까지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원하는 것을 외치고 도모하며 사랑받고 사랑하고 또 눈부시고 날카롭고 황홀하게, 그걸 전 바랍니다. 원해요. 여러분들이 눈부시고 날카롭고 황홀하고 날카로운 상태로 죽는 날까지 존재하기를."
밴드 브로콜리 너마저 잔디가 '인디밴드 살림 살기'라는 주제로 발표하는 모습. 김수정 기자다음 해에 초청하고 싶은 여성 뮤지션의 곡을 부르는 것은, 기획자 오지은이 직접 밝힌 '영희 페스티벌'의 '전통'이다.
오지은은 한영애의 '누구 없소'와 '조율'을, 안다영은 르세라핌(LE SSERAFIM)의 '스파게티'(SPAGHETTI)를, 선우정아는 소녀시대(Girls' Generation)의 '포에버 원'(Forever 1)과 '소원을 말해봐'(Genie)를, 더 픽스(The Fix)는 로제의 '톡식 틸 디 엔드'(Toxic Till the End)를, 정우는 뉴진스(NewJeans)의 '버블 검'(Bubble Gum)을, 김사월은 롤러코스터(Roller Coster)의 '어느 하루'를, 정새벽은 숨비의 '너의 전체'를 불렀다.
'영희 페스티벌'에선 많은 것이 가능했다. "한국의 인디 뮤지션들이 좀 더 안정적이고 편안하고 건강하게 음악할 수 있는 그런 페스티벌"(김뜻돌)이면서, 본인은 원치 않았음에도 늘 본업인 '음악'보다 먼저 호명된 수식어 '홍대여신'(요조)과 '홍대마녀'(오지은)가 약 20년이 지난 지금에야 그땐 하지 못했거나 해도 밀려나기만 했던 말을 꺼낼 수 있는 자리였다. 각기 다른 시기에 데뷔한 선후배 여성 뮤지션이 둘러앉아 '몸값'(페이) 협상 노하우와 정신과 신체 건강은 어떻게 돌보는지를 공유하기도 했다.
동시에 "늘 남자에 미쳐 있었지만 더 많은 정신력을 쏟은 건 여자들과의 관계"(최지은)였고 "여자가 나를 미워하면 어떡하지 하는 것에 늘 노심초사했던 시간들이 있었다"(들개이빨)라고 고백하고, '덕분에 아이 낳고도 음악할 용기가 생겼다'라고 하는 동료의 말에 '두 아이 엄마'라는 정체성을 기재하는 음악가(잔디)가 6년 가까이 직접 부딪히며 체득한 '인디 밴드 살림 살기'를 들을 수 있는 곳이었다.
작가 최지은(왼쪽)과 만화가 들개이빨은 '우리가 여성 뮤지션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김수정 기자하나하나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어렵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고 맞장구칠 수 있는 공감대가, '영희 페스티벌'의 분위기를 고양했다. 공연이든, 대담이든, 코미디든, 관객의 '반응 민감도'가 무척 높았다. 비명처럼 느껴질 정도의 격렬한 환호성이 터지는가 하면, 관객을 무장해제 시킨 웃음은 때로 공연장 밖까지 퍼져 나가기도 했다.
뭔가를 제안하면 곧잘 응했다. 노래의 일부 소절을 불러달라는 요청을 너무 '잘' 받아준 관객을 향해 김사월은 "여러분 다 어디 숨어 있다가 지금 나타나셨나? 감동"이라며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라고 밝혔다. 댄서블한 곡을 가져왔다며 답답했던 분들은 일어나서 자유롭게 춤춰도 된다고 한 이상은은, 공연을 즐기는 관객을 보고 "어! 놀 줄 안다. 마음에 든다"라며 "잘 노시니까 너무 보기 좋다"라고 말했다.
'여성 중심'의 페스티벌이지만 '철수'(남성 관객)에게도 활짝 열린 축제가 바로 '영희 페스티벌'이었다. 행사를 마치고 오지은은 "마음에 영희가 있으면 누구나 올 수 있는 곳이 '영희페'입니다. 마음이 영희가 없으면 올 수 없는 곳이 '영희페'입니다. 그게 '영희페'의 정의이고 세상의 다양한 페스티벌의 다양한 성격 중 '영희페'의 성격은 이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힘내세요, 우울해지지 마세요. 또 만나요"(이상은)라고 인사한 '영희 페스티벌'은 사흘 간의 여정을 마치고 종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