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규백 국방부 장관. 연합뉴스정부가 추진하는 3군 사관학교 통합이 거센 저항에 직면했다. 육사 총동창회 등을 중심으로 조직적 여론전과 안규백 국방부 장관 탄핵 운동에 이어 궐기대회 같은 집단행동이 예고되고 있다. 주요 쟁점은 △사관학교의 정체성(전문성) 훼손 △육사의 사실상 폐교라는 징벌적 조치 △정치적 결정에 따른 졸속 정책 등의 사실 여부다.
정부가 충분한 의견수렴 없이 속도전으로 밀어붙인다는 지적은 일리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그 나머지는 시대 변화를 반영하지 못하거나 사실관계를 뒤튼 측면이 적지 않다. 갈등의 이면에는 기득권에 대한 집착도 깔려있다. 학교 통합과 이전은 수십년의 특권 카르텔 해체로 여겨진다는 점에서 안 장관의 말처럼 '혁명보다 어려운 개혁'일 수 있다.
사관학교 통합은 정체성·전문성 훼손인가?
육·해·공군 사관학교 통합임관식에서 신임 장교들이 국가수호 결의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육사 총동창회는 지난달 16일 기자간담회에서 "사관학교의 근본적 역할은 합동성 강화가 아닌 군 전문성 강화"라며 "사관학교 통합은 합동성이 아닌 획일화로, 각 군의 다양성을 저해할 우려"가 있다고 밝혔다.
일면 타당하지만 완전치 않은 주장이다. 일단 정부가 추진 중인 통합 국군사관학교는 '2+2 네트워크' 방식이다. 1·2학년은 공동 수업, 3·4학년은 개별 전공수업을 하는 절충안이자 반쪽 통합인 셈이다. '획일화'라고 단정할 수 없는 이유다.
미국, 영국, 프랑스 등 군사강국이 사관학교를 분리 운영하는 반면에 통합 사관학교는 일본이나 베네수엘라, 또는 군 규모가 작은 호주, 캐나다 같은 나라에 국한된다는 주장도 있다. 특히 전범국 일본 방식을 따라하는 것은 자존심의 문제라며 비판의 강도를 더욱 높이기도 한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는 다르게 봐야 한다. 영국은 4년제 일반대학을 졸업한 뒤 1년 미만의 각 군 사관학교에 입학하는 '4+1' 방식이다. 함께 모이지만 않을 뿐 내용상 일반 공통교육을 받는 셈이며, 사관학교 과정 자체가 매우 짧다. 프랑스는 그랑제콜 준비반 2년 과정을 거쳐 사관학교(3년제)에 입학한다.
정부는 사관학교가 통합되면 '규모의 경제'를 통해 경쟁력이 제고될 것이라고 한다. 수백명 수준의 사관학교를 큰 그릇에 담아 중복 기능을 절감하고 재정을 집중해 '명품 사관학교'로 키우겠다는 것이다.
학부 수준에서 전문성과 합동성을 논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는 견해도 있다. 육사 총동창회 등의 전문성 프레임을 반박하는 것이다. 이는 현 사관학교 교원의 질이 높지 않은 것과도 관련 있다. 2015년 국감 자료에 따르면 육사와 해사 교수 중 박사 학위 보유자는 각각 46%와 39%에 불과했다.
미국 육사(웨스트포인트)의 경쟁력은 생도 수 4천명 이상으로 우리와 체급 자체가 다르고 우수 교원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는 데에서 나온다. 이 학교 생도 출신 존 미어샤이머 교수 같은 세계적 석학이 우리 사관학교에선 배출되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사실 합동성 강화의 핵심은 과거와의 단절이다. 안규백 장관의 지적처럼 각 군에는 전문성이란 이름의 '칸막이'가 쳐져 있다. 사관학교의 선민의식과 순혈주의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 현역 장교는 생도 시절 사관학교 교류행사를 떠올리며 "뭔가 급을 나누고 거리를 두는 느낌이 안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고 말했다.
정부는 통합 국군사관학교 1기생이 탄생하면 각 군의 폐쇄적·배타적 기수 문화가 약화되고, 자군 이기주의보다 협력을 지향하는 새 정체성이 만들어질 것으로 기대한다.
육사 지방 이전은 폐교? 징벌적 조치?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의 행진. 연합뉴스육사 출신인 한기호·임종득 의원(국민의힘) 등은 사관학교 통합을 '통폐합'이라 규정한다. 정부는 통합을 추진할 뿐 '폐교'는 전혀 언급한 바 없음에도 그렇다. 이는 육사의 지방 이전을 사실상 폐교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군 출신 보수인사들도 처음부터 사관학교 통합을 대놓고 반대하진 않았다. 12·3 비상계엄으로 개혁 여론이 워낙 비등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육사 지방 이전이 기정사실화 되자 육사 총동창회의 '액션플랜 2026' 같은 조직적인 저항이 시작됐다. 지방 이전만은 막겠다는 것이다.
이들은 육사가 지방으로 내려가면 우수 학생 지원자가 줄어들고 우수 교원 유치도 어렵다고 우려한다. 물론 '인 서울'을 고집하는 현실적 이유를 완전히 무시할 순 없다. 하지만 '지방대 전락' 우려 때문에 서울을 떠날 수 없다는 주장은 국립기관으로서 적절치 않다.
그런 식이라면 1985년 서울에서 충북 청주로 이전한 공군사관학교는 이미 문을 닫았어야 했다. 2016년 경기 용인에서 충남 아산으로 이전한 경찰대학도 마찬가지다. KAIST(한국과학기술원)가 1989년 서울에서 충남 대덕으로 옮겨가고 포항공대는 처음부터 경북 포항에 설립됐음에도 최고의 인재가 몰리는 것도 설명할 수 없다.
해사·공사 뿐 아니라 육사도 우수 신입생이 크게 줄어들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안 장관은 "입학 성적이 계속 낮아지고 있다"고 했고, 국방부 다른 관계자는 "설마 하는 점수로 입학하기도 한다"고 상황을 전했다. 이로 미뤄볼 때 '인 서울' 여부는 부차적 문제일 뿐이며, 기왕의 학교 운영 실패에 대한 변명으로 들릴 수 있다.
전직 국방부 고위 관계자는 "이제 더 이상 우수 학생이 들어올 것이란 기대는 접고 3,4등급 (학생)이라도 잘 뽑아서 잘 키울 생각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회상 변화로 군 자체에 대한 직업적 선호도가 떨어진 현실을 냉철하게 인정하는 위에서 대책도 마련돼야 한다는 것이다.
국방부 관계자는 "통합 사관학교가 되면 파격적인 대우로 우수 인재를 모셔올 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도 외국 (명문대 출신) 박사들이 넘쳐나는 현실에 (학교가 지방에 있더라도) 교수 유치는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
사관학교는 국가가 운영하는 독점적 특수목적기관으로 대체불가 시설이다. 이는 진정한 장교 지망생에게 학교 위치는 부차적이라는 뜻이다. 육사가 지방에 있다는 이유로 서울의 다른 대학을 택하려는 학생은 사관학교의 본질적 존재 이유를 재고해야 한다. 우수한 재원일 순 있지만 군인의 정체성과는 맞지 않을 수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2월 20일 충남 계룡대 대연병장에서 열린 육·해·공군 사관학교 통합임관식에서 신임 장교들을 격려하고 있다. 연합뉴스
물론 사관학교 통합과 육사의 지방 이전은 논리적으로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없다. 하지만 육사의 지방 이전은 이재명 대통령뿐 아니라 윤석열 전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기도 했다. 지방균형발전 등의 차원에서 행정수도도 옮기는 판에 육사만은 안 된다는 것은 그 역시 특권적인 발상이다.
일각의 졸속 정책 주장도 잘 따져봐야 한다. 정부가 특정 연도를 상정해 밀어붙이는 감이 없지 않지만 사관학교 통합은 일찍이 1980년대부터 논의돼왔다. 진보·보수를 떠나 역대 정부의 단골 과제였으나 기득권의 시간끌기식 저항에 매번 동력을 상실했을 뿐이다. 이제는 정책보다 오히려 결단과 실천의 문제인데, 12·3을 계기로 주어진 골든타임이 얼마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