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손자이자 정몽준 아산사회복지재단 이사장의 장남으로, 37년 만에 HD현대의 오너 경영 체제를 본격 가동한 정기선 HD현대 회장이 17일 취임 1주년을 맞았다. HD현대 제공 "우리는 눈앞의 실적에 집착하다 시장 변화를 읽지 못해 혹독한 대가를 치렀던 아픈 경험을 갖고 있다. 미래 사업을 더욱 치열하게 고민하고 준비해야 한다."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손자이자 정몽준 아산사회복지재단 이사장의 장남으로, 37년 만에 HD현대의 오너 경영 체제를 본격 가동한 정기선(44) HD현대 회장이 지난 8월 사장단 회의에서 던진 화두다. 과거 호황기에 안주하다 시장 변화에 제때 대응하지 못했던 경험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였다.
정 회장이 17일 취임 1주년을 맞았다. 그는 지난 1년 동안 조선·전력기기 시장 호황을 역대 최대 실적으로 연결하고 주요 계열사 통합을 마무리했다. 엔진·원자력·인공지능(AI)을 차세대 성장축으로 키우며 사업 영역도 넓히고 있다.
정 회장은 1년 전 HD현대 사장단 인사에서 수석부회장에서 회장으로 승진했다. 1982년생인 그는 2009년 현대중공업에 입사한 지 16년 만에 그룹 수장에 올랐다.
HD현대의 올해 상반기 연결 매출은 42조113억원, 영업이익은 6조9594억원이다. 영업이익은 전년 동기 대비 187% 증가했다. 지난해 연간 영업이익(6조996억원)은 반년 만에 넘어섰다. 증권가는 올해 매출과 영업이익을 각각 약 85조원, 약 13조원으로 전망하고 있다.
계열사별로는 HD한국조선해양과 HD현대일렉트릭의 상반기 영업이익이 각각 3조1111억원, 5453억원이었다. HD한국조선해양은 약 100조원의 수주잔고를 확보했다. HD현대중공업은 14일 중동 선사와 초대형 가스운반선(VLGC) 4척을 6258억원에 건조하는 계약을 맺었다. 이를 포함한 HD한국조선해양의 올해 수주액은 192억5000만달러로, 연간 목표의 82.6%에 이른다. HD현대일렉트릭은 상반기 두 분기 모두 24~25%대 영업이익률을 기록했다.
정 회장은 수석부회장 시절 추진한 사업 재편을 취임 후 마무리했다. 지난해 12월 HD현대중공업과 HD현대미포를 합병해 대형부터 중형 선박까지 아우르는 생산체계를 갖췄다. 통합 HD현대중공업은 마스가(MASGA·한미 조선협력 프로젝트)에 대비해 함정 건조 역량을 높이고, 2035년 매출 37조원, 방산 부문 매출 10조원을 달성한다는 목표다.
올해 1월에는 HD현대건설기계와 HD현대인프라코어를 통합한 HD건설기계가 출범했다. '현대'와 '디벨론' 두 브랜드 체제로 운영되며, 지난 5월 인도 굴착기 시장에서 월간 점유율 20.5%로 1위에 올랐다.
AI 전력 수요 공략…발전엔진·SMR에 1조722억원 투자
신사업의 중심은 에너지다. HD현대중공업은 독자 개발한 중형 엔진 '힘센(HiMSEN)엔진'을 앞세워 데이터센터용 발전설비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지난 4월 미국 에이페리온에너지그룹과 6271억원 규모 발전설비 공급계약을 맺으며 미국 데이터센터 시장에 처음 진출했다. 이어 8월에는 코반에너지그룹과 약 1조원 규모 계약을 체결했다. 올해 따낸 두 건의 계약 규모는 총 1조5831억원이다.
HD현대중공업은 지난 9월 울산 온산 발전엔진 신규 생산기지에 8336억원, 소형모듈원자로(SMR) 주기기 전용 공장에 2386억원 등 총 1조722억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증설을 통해 2028년까지 발전용 힘센엔진 생산능력을 연간 3GW에서 7.2GW로 늘린다.
계열사도 전력 인프라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HD현대일렉트릭은 지난 7월 글로벌 빅테크 기업과 최대 1조1212억원 규모의 장기 공급 기본계약을 맺었다. 연간 수주 목표는 42억2200만달러에서 51억8500만달러로 22.8% 상향했다. 미국 앨라배마 제2공장 증설로 북미 초고압 변압기 생산능력도 50% 늘릴 계획이다. HD현대마린솔루션은 이달 초 선박·육상발전용 엔진 서비스 기업 골텐스(Goltens)의 지분 100%를 인수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원자력 분야에서는 미국 SMR 기업 테라파워와 협력하고 있다. HD현대는 2022년 테라파워에 투자한 데 이어 2024년 원자로 용기를 수주했고, 올해 5월에는 차세대 나트륨 원자로 주요 설비 제작·공급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 같은 달 테라파워, 현대건설과 사업 협약을 체결해 HD현대가 주기기 제조를, 현대건설이 설계·조달·시공을 맡기로 했다. 정 회장은 8월 빌 게이츠 테라파워 창업자 겸 회장과 만나 상용화 방안을 논의했다.
SMR을 선박 동력원으로 활용하는 기술도 개발 중이다. HD현대는 지난해 미국선급(ABS)으로부터 1만5000TEU급 원자력 추진 컨테이너선 설계 기본인증(AIP)을 받았다. 3월에는 ABS와 1만6000TEU급 컨테이너선용 원자력 연계 전기추진시스템 공동 개발에 착수했다.
AI·로봇 조선소…해외 생산거점 확대
생산 현장에서는 2030년 완료를 목표로 '미래 첨단 조선소(FOS)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HD현대는 구축이 완료되면 생산성은 30% 높아지고 선박 건조 기간은 30% 단축될 것으로 기대한다. 지난해 11월 AI센터와 DT혁신실을 통합한 AIX추진실을 출범시켰고, 지난 7월에는 독일 지멘스와 차세대 마린 플랫폼 구축 계약을 체결했다. 미국 페르소나 AI와 조선소용 용접 휴머노이드를 공동 개발하는 한편, 9월에는 국내 로봇 기업 에이딘로보틱스 지분을 인수했다.
해외에서는 HD현대베트남조선의 생산능력을 연간 15척에서 2030년 23척으로 늘리고, HD현대필리핀은 2030년까지 유조선 10척을 건조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출 계획이다. 인도에서는 정 회장이 1월 나렌드라 모디 총리와 조선업 협력 방안을 논의했고, 4월 업무협약을 거쳐 타밀나두주 정부와 합작 조선소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미국 시장 공략도 이어가고 있다. HD현대는 미국 헌팅턴잉걸스(HII)와 지능형 용접 시스템 시범사업에 착수했고, 에디슨 슈에스트 오프쇼어(ECO)와는 2028년까지 중형급 컨테이너선을 공동 건조하기로 했다. 방산기업 안두릴과는 무인수상정을 공동 개발하고, 키윗과는 현지 선박 건조와 블록·모듈 생산 협력을 추진 중이다. 정 회장은 지난 9월 필리핀 국방장관과 만나 함정 수출 확대 방안을 논의했다. HD현대중공업은 필리핀 후속 호위함과 사우디아라비아 차기 호위함 수주를 추진하고 있다.
정기선(왼쪽 두번째) HD현대 회장이 지난 3월 베트남 중남부에 위치한 HD현대에코비나를 찾아 현장 설비와 안전 시설물을 점검하고 있다. HD현대 제공현장 경영도 활발히 이어갔다. 취임 후 약 한 달 만에 청주 HD현대일렉트릭 배전캠퍼스, 음성 HD현대에너지솔루션·HD현대건설기계 사업장을 방문했고 지난 3월에는 베트남에 있는 HD현대베트남조선과 HD현대에코비나를 찾았다.
정 회장은 현장을 둘러보며 "회사 경영의 기본은 현장이고, 모든 문제의 해답은 현장에 있다"고 강조했다.
취임 이후 직원들과 직접 만나 소통하는 자리도 꾸준히 마련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정 회장은 울산 HD현대중공업 인재교육원에서 열린 '하이파이브 데이'에 참석해 170여 명의 직원들과 4시간 동안 자유롭게 대화하며 조직문화 개선과 일하는 방식 등에 대한 의견을 나눴다. 당시 정 회장은 "HD현대의 강점은 어떻게든 해내는 실행력과 추진력"이라며 "이러한 강점을 유지하면서도 서로 소통하고 상대방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이 더 나은 조직문화를 이끌 것"이라고 강조했다.
HD현대 관계자는 "오너로서의 성품도 훌륭하고 대외적으로도 평판이 참 좋다"고 말했다.
中 추격·노사 갈등은 과제
그러나 과제도 적지 않다. 중국은 글로벌 조선 점유율을 확대하는 가운데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 등 고부가가치 선종에서도 기술 격차를 빠르게 좁히고 있다. 정 회장은 지난해 취임 담화문에서 "중국의 시장 잠식이 모든 선종에 걸쳐 가속화하고 있다"고 진단한 바 있다.
HD현대중공업의 노사 관계도 숙제다. 노조는 올해 교섭 과정에서 7차례 전 조합원 부분파업을 벌였고, 임금·단체협약 잠정합의안은 지난 2일 조합원 찬반투표에서 52.14%의 반대로 부결됐다. 중동 전쟁으로 HD현대오일뱅크 실적은 개선됐지만, 전쟁이 장기화하면 타격이 불가피하다는 우려도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아직 평가는 이르지만 젊은 오너로서 무난하게 잘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고 했다.
다른 관계자는 "정 회장의 지난 1년은 조선업 호황에 안주하지 않고 SMR·수소·AI·로봇 등 미래 성장동력을 발굴하고 사업구조를 재편하는 데 속도를 낸 한 해였다"며 "이 같은 신성장동력을 바탕으로 HD현대가 향후 어떤 성과를 보여줄지 기대된다"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축하 메시지를 보내는 정기선 HD현대 회장. HD현대 제공영문기사 보기 (View English Arti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