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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제국의 교회에서 평화의 교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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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10-19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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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의 시대가 저무는 자리에서 교회의 본질을 묻다

복원 공사 중인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윤 교수 제공복원 공사 중인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윤 교수 제공
지난 9월, 한때 세계를 호령했던 제국들의 옛 자취를 따라 유럽을 걸었다. 힘으로 세운 제국의 길이 한계에 이른 지금, 인류는 어디에서 공존의 길을 찾을 수 있을까. 앞선 기고 「제국의 길이 다한 곳에서, 평화공존의 길을 찾다」에서 나는 그 길을 일본 평화헌법에 담긴 공존의 가능성에서 찾아 나섰다. 같은 물음을 품고, 사랑과 평화의 복음을 전하는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에서 그 답을 찾아보려 한다.

화려한 궁전과 개선문 같은 제국의 기념물을 지나는 동안, 내 발걸음을 가장 오래 붙든 것은 평소 마음에 품어 왔던 유럽 교회의 오늘이었다. 마을마다 하늘을 찌를 듯한 첨탑이 솟아 있었고, 웅장한 성당은 주변을 압도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서자 풍경은 달라졌다. '매매·임대(FOR SALE / LET)' 현수막을 내건 교회가 있었고, 공연장이나 여행자들의 호스텔로 바뀐 예배당도 있었다. 첨탑은 여전히 하늘을 향하고 있는데, 그 아래 모이던 사람들은 떠나고 있었다.
잉글랜드의 한 교회에서 열린 유아세례 예배. 윤 교수 제공잉글랜드의 한 교회에서 열린 유아세례 예배. 윤 교수 제공
그래도 비어 가는 예배당 한편에서 신앙은 여전히 숨 쉬고 있었다. 잉글랜드의 한 성공회 교회에서 드린 주일예배에서는 유아세례식이 열렸다. 부모와 대부모가 "그리스도께로 돌아섭니다(I turn to Christ)"라고 고백하는 동안, 피부색도 나이도 다른 교우들이 그 곁을 지켰다. 텅 빈 예배당과 함께 모인 회중을 번갈아 떠올리며 나는 생각했다. 무너지고 있는 것은 신앙이 아니라, 힘과 손잡았던 교회의 낡은 모습이 아닐까. 세례 문답의 고백처럼 교회도 그리스도께로 돌아설 수 있다면, 그래서 제국의 교회가 평화의 교회로 거듭난다면, 다음 세대에게도 평화의 소망을 건넬 수 있지 않을까. 그 물음을 안고, 나는 교회가 제국과 함께 걸어온 발자취를 따라 걸었다.

십자가 곁에 선 제국의 깃발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은 1804년 나폴레옹이 교황을 앞에 두고 스스로 황제의 관을 머리에 쓴 곳이다. 2019년의 화마를 딛고 다시 문을 연 그 성당에 앉아, 나는 오래 생각에 잠겼다. 교회는 언제부터 제국의 권위를 빛내는 무대가 되었을까. 그 시작은 4세기, 박해받던 교회가 로마 제국의 공인과 보호를 받으면서부터였다. 그 뒤 교회와 권력은 천 년 넘게 서로의 권위를 주고받으며 함께 걸었다.

선교의 역사도 다르지 않다. 바다를 건넌 선교사들 대부분은 순수한 소명으로 길을 나섰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오른 배의 돛대와 그들이 내린 항구에는 대개 제국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아편전쟁 뒤 1858년 청나라가 서구 열강과 맺은 톈진조약에 선교를 보장하는 조항이 들어간 것은 그 상징적인 예다. 물론 자메이카의 윌리엄 니브처럼 제국의 그늘 안에서 노예제 폐지에 앞장선 선교사들도 있었다. 복음이 권력 곁에 서면 제국의 언어를 배우기 쉽고, 고난받는 사람 곁에 서면 제국의 양심을 깨울 수 있다.

제국을 움직이는 원리는 나부터 살아남는 것이다. 나의 안전과 번영을 위해서라면 남의 희생도 감수한다. 그러나 십자가는 '내가 살기 위해 네가 죽어야 한다'가 아니라 '네가 살도록 내가 나를 내어놓겠다'는 선언이다. 그 십자가가 세력을 넓히는 깃발이 되고, 성공과 축복을 얻는 수단이 되었다면, 무엇인가 크게 뒤바뀐 것은 아닐까.

호스텔로 바뀐 에든버러의 옛 교회, 텅 빈 잉글랜드의 한 교구교회. 윤 교수 제공호스텔로 바뀐 에든버러의 옛 교회, 텅 빈 잉글랜드의 한 교구교회. 윤 교수 제공

칼의 시대는 저물어 가고 있다

그 뒤바뀜은 오늘의 전쟁에서도 되풀이되고 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988년 키이우 루스의 세례에서 비롯된 같은 신앙의 뿌리를 공유한다. 그러나 러시아 정교회의 키릴 총대주교는 그 기억을 '러시아 세계'라는 제국의 구상으로 묶었고, 2024년 3월 그가 이끄는 세계러시아인민회의는 이 전쟁을 '성전(聖戰)'으로 규정했다. 대부분 같은 정교회 신앙을 지닌 사람들끼리 맞선 이 전쟁에서 종교는 제국의 꿈을 거룩하게 포장하는 도구가 되었다.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이 모두 거룩하게 여기는 예루살렘을 둘러싼 중동의 오랜 충돌 역시, 땅과 민족의 갈등에 종교적 신념이 깊이 배어들면서 갈수록 풀기 어려워졌다. 종교는 전쟁의 유일한 원인은 아닐지라도, 갈등을 더 깊고 오래가게 만드는 불씨가 되어 왔다. 인간의 욕망이 하나님의 이름을 빌리는 순간, 종교는 폭력을 억제하는 힘이 아니라 정당화하는 명분이 되기 쉽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으로 힘을 거룩하게 만드는 이 오래된 유혹이, 오늘날에는 훨씬 더 위험해졌다. 지금까지 제국을 지탱한 것은 남이 갖지 못한 압도적인 힘이었다. 그러나 그 힘의 독점이 흔들리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전장에서 값싼 드론이 거대한 전차를 멈춰 세웠듯, 파괴의 수단은 이제 더 많은 나라와 집단의 손에 들어가고 있다.

힘의 경쟁을 묶어 두던 장치들도 하나둘 풀리고 있다. 올해 2월에는 미국과 러시아 사이에 남아 있던 마지막 핵 군비통제 조약인 뉴스타트가 후속 조약 없이 만료되었다. 5월에 열린 핵확산금지조약(NPT) 평가회의도 세 차례 연속 합의문을 내지 못하고 끝났다. 핵무기를 가진 나라들 스스로 '핵전쟁에는 승자가 없다'고 여러 차례 확인해 왔지만, 정작 그 말을 지켜 줄 울타리는 낮아지고 있다.

힘으로 남을 이겨 살아남는 길이 모두가 함께 무너지는 길이 될 수 있는 시대다. 그렇다면 힘에 기대고 힘을 축복해 온 교회는 이제 어디에 서야 하는가. 지금 힘을 축복하는 일은 자칫 공멸을 축복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교회가 지난날처럼 제국과 동행할 수 없는 까닭이다.

힘의 논리가 여전히 세상을 움직이는 지금, 평화공존을 말하는 것은 현실을 모르는 순진한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서서히 데워지는 냄비 속 개구리는 물이 끓기 직전까지 위험을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한다. 전쟁이 '성전'으로 불리고 군축의 약속이 하나둘 무너지는 소식을 익숙한 풍경으로 받아들이는 사이, 인류도 그렇게 조금씩 벼랑 끝으로 다가가고 있는지 모른다. 모두가 힘을 말할 때 평화를 말하는 것은 순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교회가 끝까지 놓아서는 안 될 사명이다. 세상이 칼을 더 날카롭게 갈수록, 교회는 마지막까지 평화로 인류가 함께 사는 길을 가리키고 그 길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다행히 교회의 뿌리에는 본래 다른 길이 있었다. 콘스탄티누스 이전의 초대교회는 권력도 군대도 없는 소수의 공동체였다. 여러 교부들은 그리스도인이 칼을 드는 일을 깊이 경계했고, 역병이 돌 때 버려진 병자 곁을 끝까지 지킨 이들도 그리스도인들이었다. 그들은 힘이 아니라 사랑으로 로마 사회에 스며들었다.

그 평화의 정신이 교회 밖에서 법의 옷을 입은 예로, 나는 일본의 평화헌법을 떠올린다. 물론 이 헌법은 일본이 스스로 깨달아 만든 것이 아니다. 패전과 점령이라는 전쟁의 결과로 태어났고, 그 안에는 일본이 아시아 이웃에게 남긴 상처에 대한 반성의 요구도 담겨 있다. 그럼에도 전쟁을 포기하고 교전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제9조는,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리라던 이사야의 오랜 꿈과 맞닿아 있다. 그런데 지금 일본에서는 이 헌법을 고치려는 논의가 다시 힘을 얻고 있다. 평화헌법의 가치는 문구가 아니라 그것을 지켜 내는 데 있다. 개정의 압력 앞에서 이 헌법이 끝내 지켜질 때, 비로소 그것은 일본을 묶는 족쇄가 아니라 일본과 이웃 모두를 위한 축복의 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헌법을 어떻게 할지는 물론 일본 시민들이 정할 일이다. 다만 평화는 어느 한 종교나 문명의 전유물이 아니기에, 그 약속을 지키는 일은 일본만의 몫이 아니며, 평화의 교회로 거듭나려는 교회가 이웃 종교, 시민들과 함께 짊어져야 할 몫이기도 하다.

바르셀로나 포블레노우의 작은 복음교회. 예배를 앞둔 화면에 세 언어로 "환영합니다"가 떠 있다. 윤 교수 제공바르셀로나 포블레노우의 작은 복음교회. 예배를 앞둔 화면에 세 언어로 "환영합니다"가 떠 있다. 윤 교수 제공

우리는 무엇을 남길 것인가

유럽의 마을마다 첨탑이 주변을 압도하고 있었다면, 한국의 도시에서는 밤마다 붉은 십자가들이 하늘을 찌른다. 그러나 높이 솟은 것이 과연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길일까. 올해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의 조사에서 한국교회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75.4%로 조사를 시작한 2008년 이후 가장 높았다. 교회의 크기와 교인 수가 목회의 성공처럼 여겨지는 사이, 성장주의와 기복신앙은 어느새 자본주의의 번영 신화를 닮아 갔다. 제국에 봉사하던 옛 종교가 얼굴만 바꾼 채 우리 안에 남아 있는 것은 아닐까.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말은 나를 포함해 우리 모두에게 너무 귀에 익은 구호다. 돌아가야 할 곳은 초대교회의 제도가 아니라 그 영성일 것이다. 교리의 울타리를 지키는 데 머물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삶으로 살아내던 영성, 기적과 축복을 앞세우기보다 날마다 안으로부터 성숙해 가던 신앙이다. 그것은 세상을 피해 개인의 경건 속에 숨자는 말이 아니다. 평화의 교회는 결국 평화를 사는 한 사람에게서 시작된다고 나는 믿는다. 원수를 위해 기도할 줄 아는 한 사람이 있는 곳에서 평화공존의 길도 비로소 닦이기 시작할 것이다.

바르셀로나에서 찾아간 작은 복음교회에는 첨탑도 웅장한 건물도 없었다. 그러나 예배를 마친 교우들은 처음 본 나그네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 주었다. 예수께서도 거대한 성전을 남기지 않으셨다. 몇 사람의 제자와 "서로 사랑하라"는 삶의 방식을 남기셨을 뿐이다. 그 작은 사랑이 로마제국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목회자인 나 역시 이 물음 앞에서 자유롭지 않다. 나는 은퇴 후 춘천 산천리의 작은 교회에서 자비량으로 목회하고 있다. 이 작은 예배 자리에는 이른바 '가나안 성도'들과 저마다의 길 위에서 하나님을 찾는 순례자들이 함께한다. 우리는 교인 명부를 두지 않는다. 예배를 마치면 흩어져 밀알과 누룩으로 살자고 서로 축복하고, 12년째 일본의 시민들과 손잡고 평화헌법 지키기 서명을 이어 오고 있다. 아직 작은 실험일 뿐이지만, 그 길에서 나는 '교인'이 아니라 '동역자'를 만나고 있다. 이 글이 한 시골 목회자의 외로운 외침에 그칠지라도, 누군가의 마음에 작은 울림으로 닿기를 소망한다.

제국의 교회에서 평화의 교회로. 힘의 논리를 회개하고 평화를 만드는 교회로, 교회의 크기를 자랑하는 신앙에서 한 사람의 아픔 앞에 무릎 꿇을 줄 아는 신앙으로. 힘으로 세운 문명이 막다른 골목에 이른 지금, 칼 대신 보습을 드는 삶을 먼저 걸어 보이는 것이야말로 문명의 대전환기에 교회가 섬김으로 앞장서야 할 길이 아닐까. 누군가는 이것을 돈키호테의 꿈이라 부를지 모른다. 그러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드는 꿈은 한 사람의 꿈이 아니라, 교회가 처음부터 품어 온 하나님의 꿈이다. 그 꿈을 따라 걸을 때, 교회는 다음 세대에게 평화의 소망을 건넬 수 있으리라. 그리고 어쩌면 세상은 다시 교회에 물을지도 모른다. "당신들이 믿는 예수는 어떤 분인가." 그때 우리는 말이 아니라 삶으로 대답해야 할 것이다.

- 윤재선 목사는 40여 년간 대학에서 지방행정학을 가르쳤으며, 은퇴 후 목회와 함께 동북아 평화공존 활동과 지역진흥 운동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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