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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콩만한 권리로 비행기를 주무르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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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상욱의 기자수첩] 재벌 3세 경영에 대한 우울한 묵시록

테마가 있는 고품격 뉴스, 세상을 더 크고 여유로운 시선으로 들여다보는 CBS <박재홍의 뉴스쇼=""> '기자수첩'에서는 정의롭지 못한 것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담았다. [편집자 주]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과 조현아 전 부사장 (자료사진)

 

땅콩 회항 사태가 당사자의 추태 비난을 넘어 부의 세습과 재벌에 대한 비판으로 번지고 있다. 조 부사장의 추태를 덮기 위해 거짓 해명을 늘어놓고 거짓진술을 강요한 대한항공의 엉터리 위기관리도 사태가 악화되는데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세월호 사고에서도 보았듯이 위기관리의 핵심은 진정성과 정직, 투명함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 재벌그룹의 구조와 문화가 이미 진정성과 정직함으로부터 너무 멀리 있기에 이는 근본적인 수술을 필요로 한다 하겠다.

[변상욱의 기자수첩 전체듣기]

◈ 재벌 3세, 땅콩만한 권리로 비행기를 움직여?

지적되고 있는 대로 우리의 재벌기업에서는 소속 직원을 소유물이나 부속품처럼 여기고 위압적인 언사와 폭력을 휘두르는 천민자본주의적 양태들이 비일비재했다. 거기서 과보호와 특권의식으로 키워진 재벌 3세들은 은수저를 물고 태어난 게 아니라 자칫 인성을 망가뜨릴 독을 물고 태어났다는 게 옳은 진단일 것이다.

그 3세들이 경영에 실패해 막대한 손실과 기업가치의 폭락을 가져왔을 경우 자기 재산 자기가 실패한걸 뭐 어쩌겠냐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다, 이들은 그 기업의 소유주가 아니다.

'2014년 대기업집단 주식소유 현황'(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SK의 총수 일가 지분율은 0.5%, 현대중공업 1.2%, 삼성 1.3%, 한화 1.9%, 현대 2.0%에 불과하다. 기업을 그들 마음대로 할 만큼의 지분도 갖고 있지 않고, 준비도 안 된 사람들한테 국가 경제의 운명이 편법적으로 떠맡겨져 있는 것이다.

재벌기업의 부실과 몰락은 국가 경제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는 중한 사태이다. 그 손실은 주주들에게 직접 돌아가고 뒷수습은 국가와 국민이 떠맡아야 한다.

재벌 그룹들의 미래는 한국 경제의 미래이고 그들의 실패는 국가가 떠맡을 짐이 된다. 재벌 부모가 가진 재산이니 세금 내고 상속받는 걸 뭐라 할 건 아니다. 그러나 경영권만큼은 세습의 대상이 아니다. 주주와 이사회 앞에서 능력을 겨뤄 누구나가 실력으로 맡을 수 있는 경쟁의 대상이어야 한다.

이번 땅콩 회항 사태는 개별 기업의 문제, 비뚤어진 재벌 3세의 해프닝으로 넘길 일이 아니다. 재벌 구조의 문제이며 국가경제의 미래를 위해 왜곡된 질서를 바로 잡는 일과 연계시켜야 한다.

◈ 재벌… 3세 경영에서 끝난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왼쪽)과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오른쪽) (자료사진)

 

유럽에서 흔히 하는 말 중에 "창업자는 기업을 설립하고, 2세대는 기업을 물려받고, 3세대는 기업을 파괴한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기업을 자식에게 물려주는 문제를 조심스러워 한다. 그러나 수백 년을 이어가는 가족기업도 있다. 수백 년 가업을 이어가는 기업의 비결 중 하나는 사회적 책임 의식을 키우고 합리적인 승계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다. 기업을 사유물로 생각지 않고 성공만을 바라보며 내달리지 않는 점이 가족기업을 오래도록 유지하는 비결로 꼽힌다.

1. 이탈리아 마리넬리家는 1천년 이상 鐘을 만들었다. 직원이 20명 정도인 작은 기업이다. 이 가문 기업의 특징은 자녀 교육. 주물공장에 경영주의 자녀들이 유치원 때부터 들락거리며 할아버지·아버지의 직장 동료들과 교유를 갖는다. 착한 일을 하거나 칭찬을 받으면 주말에 주물공장에 와서 마음대로 놀게 하는 것. 그러면서 주물공장의 모든 업무들을 머리에 담고 시스템을 익혀 나간다. 가업승계를 강요하지 않지만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아버지를 모시고 일한 사람들에게서 가업에 대한 자부심을 전해 듣고 자라다 보니 가업에 대한 관심과 참여 열의가 높다.

2. 오스트리아 스와로브스키家는 1895년 시골마을에서 시작한 130년 정도 된 가족기업이다. 5대째 이어오며 세계적인 브랜드가 되었다. 창업자가 세 아들에게 똑같이 지분을 나눠주었고 그 아들들 역시 자녀들에게 균등하게 또 나눠주고… 그런 식으로 지분을 나누며 승계하다보니 지금은 150명의 스와로브스키 일가가 경영권을 나눠 갖고 있다. 일부는 각자에게 적합한 일을 맡아 경영에도 두루 참여하고 있다. 후계자를 정해 지분과 권력을 몰아주지 않는 원칙이 돋보이는 특징이다. 회장 자리에 오르려면 물려받은 지분으로 되는 게 아니다. 가족위원회가 이사 들 중에서 8명을 뽑아 추천위원회를 구성하고 추천위원회가 회장 후보를 고른다. 지분을 갖게 된 가족이라도 입사가 바로 이뤄지지 않고 2, 3년 수습을 거치거나 외부에서 10년 정도 일해 전문성을 인정받아야 한다. 가족 헌장과 회사 규정에 이런 것들이 반영돼 있다.

3. 스웨덴 보니어家는 1804년 코펜하겐에서 개업한 서점에서 시작됐다. 8세대를 거쳐 내려오며 20여 개국에 200개 이상의 기업을 거느린 미디어 재벌로 자리 잡았다. 그룹의 주식은 가족이 100% 보유하고 있다. 외부에 주식을 팔지 않는다는 가족 만장일치의 주주합의서가 있다. 팔고 싶으면 외부인이 아닌 회사에 팔아야 하는데 이때의 가격은 공정한 가격의 30% 선이다. 시장에 내놓는 주식을 사기 위해 회사가 무리하게 자금을 쏟아 붓지 않도록 배려 한 것. 예전에는 아예 회사에 팔되 가격은 0원으로 못 박은 적도 있다. 아들딸에게 헐값에 주식을 주고 회사가 다시 자금을 들여 비싸게 사주는 수법으로 부를 세습하는 우리 사회의 행태는 얼마나 부끄러운가. 더 큰 문제는 별로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사회도 분노하지 않는다는 것. 보니어그룹을 움직이는 최종결정기구는 당연히 모든 지분을 소유한 가족회의이고 여기서 후계자 후보를 지명한다.

4. 스웨덴 발렌베리 가는 160년 동안 5대에 걸쳐 유지되고 있는데 삼성과 다른 점은 국민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 있다는 점이다. 스웨덴 산업화를 발렌베리 가문이 이뤄냈다고 할 정도로 국가경제에 공헌했고 국민들도 자랑스러워한다.

일찍부터 경제·경영 분야의 전문가를, 길러 낼 대학을 세웠고 기초학문 연구를 지원해 노벨상 수상자들을 쏟아냈다. 그러면서도 탄탄한 글로벌 기업들 - 에릭슨, 사브, ABB, 일렉트로룩스, 아틀라스콥코 등 18개 기업을 거느리도록 성장했다. 그러나 그렇게 모은 재산은 대부분 공익 재단으로 넘겨져 있다. 가족들은 개인재산은 얼마 안 되지만 공익재단을 나눠 맡고 있다. 어린 자녀들에게 놀고먹는 칠공자가 결코 허용되지 않는다. 옷은 형·언니 옷 물려 입고, 집안 일 하고, 그 대가로 약간의 용돈을 주고 거기서 또 저축을 시키는 걸로 유명하다. 사고치거나 잘난 척 해서 언론에 이름이 오르내리면 야단맞는다. '존재하지만 드러내지 않는다'가 가문의 좌우명. 발렌베리는 국가에 엄청난 세금을 낸다. 남들처럼 스위스로 옮기고 피하면 막대한 세금을 아낄 수 있지만 그러지 않는다. 발렌베리 그룹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가문의 영화와 가문의 사회적 책임, 기업의 세계화와 애국심을 절묘하게 결합한 기업경영 시스템을 이룩했다는 점이다.

발렌베리 가문은 삼성에서 벤치마킹한 걸로 유명하다. 발렌베리를 살폈다면 유럽과 미국의 유명한 가업들을 거의 모두 연구했다는 건데 그 결과가 이거라면 참담하다. 삼성 뿐 아니라 다른 재벌 가문들도 이 정도 유럽 가업의 역사와 전통을 모를 리 없다. 필요한 것만 선별해 흉내는 내지만 그 가업 전통의 정수精髓는 외면하고 있는 셈이다. 결국 기업을 가업으로 삼기 위해서 필요한 가문과 기업 내부의 문화 구축, 사회적 합의와 공헌은 외면하고 땅콩 한 봉지만한 지분과 책임의식으로 커다란 비행기를 자기 것인 양 움직이려다 보니 늘 탈이 나는 것이다. 이런 기업들을 우리는 어디까지 믿고 키워야 하는 걸까? 재벌 3세 경영의 미래는 암울하다. '천민자본의 3대 세습'이 한계에 직면할 때 한국 경제는 어찌 될지도 암울하다.

세습은 정치이다. 기업을 사회의 자산으로 보지 않고 가족의 것으로 움켜쥐려는 욕망과 특권의식이 존재하고 그 주변에 작은 특권과 떡고물을 바라는 사람들의 욕망이 모여든다. 이것을 유지토록 길을 열어주는 정치권력이 있고 그 정치권력은 그 대가로 들어 온 돈을 수단으로 해 정치적 특권 역시 세습해 나간다. 땅콩 한 봉지에 그 기득권을 향한 왜곡된 욕망들이 버무려져 있음을 바로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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