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
"소중한 가정의 가치가 법에 의해 지켜지길 바라 마지않습니다." (항소심 첫 변론 후 노소영 관장)
"개인적 일로 국민께 걱정과 심려를 끼쳐드린 점 사과드립니다." (항소심 선고 후 최태원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이혼 소송 항소심 여진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최 회장 측이 판결문에 '숫자 오류'가 있다며 문제를 제기한 이후 판결문이 고쳐지고, 이례적으로 재판부가 설명자료까지 배포하는 등 장외 공방이 계속되는 겁니다.
오늘 '법정B컷'은 최 회장과 노 관장 두 사람의 이혼 소송 항소심 선고 날과 이례적인 법정 밖 공방을 보겠습니다.
'숫자 오류' 지적하자 판결문 고친 재판부
1심 재산분할액 665억원과 비교해 20배나 뛴 항소심의 재산분할 액수. 1조3808억원이란 압도적 액수에 항소심 재판은 노 관장 측이 '압승'을 거뒀다는 평가가 따라붙었습니다.
그러자 최 회장 측은 선고 2주가 지난 시점에 기자회견을 열고 반전 카드를 꺼냅니다. 특히 최 회장이 지난 17일 직접 "항소심 재판에 재산 분할과 관련해 '치명적 오류'가 있다"라며 취재진 앞에 나섰습니다.
최 회장 측은 재산분할 대상으로 인정된, 최 회장의 재산 대부분을 차지하는 SK(주) 지분의 근간이 되는 대한텔레콤 주식의 가치 평가가 잘못됐다고 주장했습니다. 재판부가 최종현 선대회장의 사망 무렵인 1998년 5월 대한텔레콤의 주식가액을 1주당 100원으로 계산했는데, 두 차례 액면 분할을 고려하면 1주당 주가가 '0' 하나가 더 붙는 1천원이라는 겁니다.
24.06.17 SK그룹 기자회견 中 최태원 회장 측 대리인 |
최종현 선대회장의 생존 시에는 SK C&C(대한텔레콤) 가치가 125배 성장했는데도, 단순히 12배 성장한 것으로 잘못 판단했습니다. 반대로 재판부는 선대 회장 사망 이후 상장 시점인 2009년까지 35배 정도로 성장했음에도 이를 355배 급성장으로 잘못 봤습니다. 그와 같은 잘못된 전제하에 재산 분할 대상을 확정하고, 기여를 결정했습니다. |
SK 측은 바뀐 수치로 계산하면 최 회장의 기여도는 확연히 줄게 되고, 최 회장은 승계·상속 받은 돈으로 성장한 사업가(승계상속형)가 된다고 주장합니다. 최 회장 측은 소송 과정에서 '자수성가형'과 '승계상속형' 사업가를 구분해 논리를 펼쳤습니다. 즉 최 회장은 선대로부터 기업을 물려받아 운영한 '승계상속형' 사업가로 '자수성가형' 사업가가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최 회장 측이 이토록 숫자 공방을 벌이는 데는 1조가 넘는 재산분할액이 나온 데 SK주식이 포함된 것이 결정적이었기 때문입니다. 1심은 SK주식을 부부의 일방이 혼인 전부터 가진 고유재산과 혼인 중 자기 명의로 취득한 재산인 이른바 특유재산(特有財産)으로 보고, 재산분할 대상으로 보지 않았거든요.
대한텔레콤 인수 자금이 선대 회장에게서 받은 돈이라는 것이 받아들여지고, 기여도 오류까지 바로잡힌다면 주식을 특유재산으로 볼 수도, 재산 분할 비율도 바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죠. SK 측은 이번 수치 오류로 '판이 뒤집힐 것'이란 예측 아래 공세를 펼쳤습니다. 반면 노 관장 측은 '침소봉대'라며 일축했습니다.
한편 서울고법 재판부는 최 회장 측 기자회견이 있고, 약 3시간 뒤에 판결문의 계산이나 표현의 오류를 바로잡는 '경정(更正)' 절차를 밟습니다. 최 회장 측 주장대로 주식 가치를 100원에서 1천원으로 수정한 겁니다.
하지만, SK 측은 단순 경정으로만 끝날 문제가 아니라며 재반박했고, 재판부는 경정 다음 날 이례적으로 A4 용지로 3장 반 분량의 설명자료를 냅니다. 요지는 주식 가액을 따지는 '중간단계' 수치가 바뀌더라도 결론과 재산분할에는 영향이 없다는 겁니다.
재판부는 오류를 정정하면, 선대회장과 최 회장의 기여도가 역전된다는 SK 주장에도 반박했습니다. 최 회장이 현재까지 회장으로 있기에 변론 종결 시점인 2024년 4월을 기준으로 보면, 주가는 16만원으로 선대회장 사망 시점보다 160배가 불어나 선대회장과 최 회장의 경영 활동 기여도는 125(8원→1천원)대 160(1천원→16만원)으로 여전히 최 회장의 기여도가 크다고 덧붙였습니다.
SK주식의 뿌리 '대한텔레콤' 종잣돈 어디서 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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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부가 수치 정정으로 결론이 바뀌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데는 SK주식이 재산분할이 된다는 근거를 더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대한텔레콤의 인수 자금이 된 '종잣돈' 2억8천만원의 출처입니다.
최 회장 측은 대한텔레콤의 인수 자금은 선대 회장으로부터 증여받은 거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선대회장과 자신의 통장 입출금 내역을 공개했죠.
때는 1994년입니다. ①그해 5월 최종현 선대회장의 A은행 계좌에서 2억8690만원이 인출되고, ②같은 해 10월 최태원 회장의 B은행 계좌로 2억 8697만원이 들어갑니다. ③또 11월 21일 오후 4시 27분 최 회장은 B은행 서울 석관동 지점에서 해당 금액을 현금으로 모두 인출합니다. ④같은 날 7분 뒤 최 회장은 A은행 광교영업부 지점으로 2억 8천만원을 입금해 주식 대금을 냅니다.
최 회장 측은 이 4단계로 이뤄진 돈의 흐름이 '동일성'을 유지하고 있다며 대한텔레콤 주식 인수 대금이 선대회장 계좌에서 인출됐다는 근거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재판부는 최 회장 측 주장을 탄핵합니다. ①과 ② 사이 5개월의 시차를 설명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특히 ③과 ④ 사이에는 고작 7분의 시차만 존재할 뿐인데, 당시 '계수 절차' 등을 감안할 때 11㎞ 떨어진 두 지점을 오가며 출금과 입금이 이뤄지기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봤습니다.
24.05.30 최태원-노소영 이혼소송 항소심 선고 中 |
통상적으로 현금이 입출금될 때 은행원들은 계수기로 확인하고, 100매 단위로 묶었다, 풀었다 합니다. 그런데 현재 지폐계수기 (속도는) 1분당 1800매를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1994년 당시에는 5만원권이 없었으니 2억8천만원이 되려면 2만8천장의 계수가 필요합니다. 100매 단위로 묶었다 푼 것까지 생각하면 현실적으로 2억8천만원 이상이 은행 창구에서 움직이면서 석관동 지점에서 현금을 출금해 불상의 계좌에 입금된 후 자기앞수표로 발행해 광교지점에 들어가는 것이 7분 만에 되는 건 불가능하다고 봤습니다. '동일성' 유지가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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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재판부는 SK주식이 원고의 실질적인 특유재산에 해당한다는 최 회장 측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SK주식을 부부 공동재산으로 보고, 1조3808억의 재산분할 대상으로 삼은 겁니다. 지폐 계수기도 판단 근거가 됐죠.
노태우 '300억원' SK로 흘러 들어가…"기여 인정"
항소심에서 새롭게 등장한 것이 '300억'의 존재입니다. 항소심 재판부가 돈의 성격을 비자금이라고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고(故)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300억원이 SK 측으로 흘러 들어가 태평양증권의 인수와 더불어 SK그룹 성장에 기여했다는 노 전 관장 측 주장을 받아들였습니다.
최 회장 측은 태평양증권 인수에는 노 전 대통령의 비자금이 아닌 계열사의 부외자금이 쓰였다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재판부는 "자료 제출을 하지 않았다"는 등의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노 전 대통령의 부인 김옥숙 여사가 보관해 온 300억원어치 약속어음과 메모가 30년 만에 딸의 이혼 소송에서 나오기도 했습니다.
24.05.30 최태원-노소영 이혼소송 항소심 선고 中 |
SK주식에 대해선 혼인 기간 취득된 것이고, 그룹 상장이나 이에 따른 이 사건 SK주식의 형성 그 가치 증가 관련해서 1991년도 경에 노태우 측으로부터 원고(최 회장) 부친 최종현에게 상당한 부분의 자금이 유입됐다고 판단했습니다. 그 부분이 최종현의 본래 개인 자금과 혼용돼 유형적 기여가 있었다고 판단됩니다. 최종현이 태평양증권을 인수하는 과정이나 SK 이동통신사업에 진출 과정에서 노태우가 최종현에게 일종의 보호막, 방패막이 역할을 함으로써 최종현 입장에서는 객관적으로는 모험적이지만, 결과적으론 성공적인 경영을 했고… SK주식을 비롯해 별지에 있는 원고 재산은 모두 공동재산 포함된다고 판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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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소심 판결의 핵심은 재판부가 SK그룹 성장에 노 전 대통령과 노 관장의 기여를 인정한 점입니다. 이에 근거하면 판결 이후 최 회장 측의 주장과 같이 SK주식 가치 상승에 선대회장과 최 회장이 각각 얼마를 기여했는지는 쟁점에서 조금은 비껴가게 됩니다.
위자료도 역대급…'세기의 이혼'은 대법원으로
이혼소송 입장 밝히는 최태원 회장. 연합뉴스
이번 재판부는 위자료 산정도 역대급으로 했습니다. 알려진 이혼 소송 가운데 최대 위자료 산정금은 2억원입니다. 이번 항소심 재판부는 유책 배우자인 최 회장이 20억원의 위자료를 노 관장에게 줘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재판부는 "장기간 부정행위를 계속하고 공개적 활동을 해 (동거인이) 유사 배우자 지위에 있는 것 같은 태도를 보였다"라고 꼬집었습니다. 더욱이 최 회장이 동거인에게는 상당한 돈을 출연해 티앤씨재단을 설립해 준 것과 달리 노 관장에게는 아트센터 나비 퇴거 소송을 제기해 상당한 정신적 고통을 줬다며, 이를 위자료 산정의 근거로 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SK 측이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미술관을 상대로 "SK 빌딩에서 나가달라"며 낸 소송은 지난 21일 SK 측의 1심 승소로 결론 났습니다.
24.06.21 SK이노베이션-아트센터 나비 부동산 인도 등 청구 소송 선고 |
이 사건 소가 최태원의 노소영에 대한 사적 감정에 의해 제기된 것으로서 피고를 SK그룹으로 부당하게 축출하고자 하는 시도라고 보기 어렵고 달리 인정할 증거가 없다. |
두 사람의 이혼소송은 최 회장이 상고장을 제출하면서 이제, 대법원 판단을 받게 됐습니다. 노 관장은 상고장을 제출하지 않았습니다.
법조계에서는 사회적 영향력이 큰 사건에 판결문 수정도 거친 만큼 대법원이 심리를 하지 않고 상고를 기각하는 심리불속행 기각으로 사건을 마무리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내다봅니다. SK주식이 재산 분할에 포함되는 것이 맞을지 두 사람의 30년 혼인 기간에 마침표를 찍을 대법원의 판단은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