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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계엄에 사망한 목사, 지난했던 유족들의 '투쟁'[법정B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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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수사보다는 재판을, 법률가들의 자극적인 한 마디보다 법정 안의 공기를 읽고 싶어 하는 분들에게 드립니다. '법정B컷'은 매일 쏟아지는 'A컷' 기사에 다 담지 못한 법정의 장면을 생생히 전달하는 공간입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지만 중요한 재판, 모두가 주목하지만 누구도 포착하지 못한 재판의 하이라이트들을 충실히 보도하겠습니다.

'광주 밖 희생자'로도 불리는 故 임기윤 목사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원과 시민들이 금남로에서 대치하고 있다. 5·18민주화운동기록관 제공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원과 시민들이 금남로에서 대치하고 있다. 5·18민주화운동기록관 제공 
국가 폭력이 남긴 고통은 얼마큼 많은 세월이 흘러야 씻겨 내려갈까요. 그 상대가 아무리 두드려도 꿈쩍하지 않는 국가라면 시간이 흐를수록 켜켜이 쌓여만 가는 아픔의 깊이를 가늠하는 일조차 또 다른 고통일지도 모릅니다.
 
고(故) 임기윤 목사는 부산 지역에서 처음으로 5·18 광주 학살의 진상을 세상에 알렸습니다. 때는 1980년 5월 17일 전두환 신군부가 비상계엄을 대한민국 전역에 확대하고, 광주 항쟁이 일어난 시기였습니다. 그해 7월 18일 임 목사는 국군보안사령부 부산지구 계엄합동수사단으로부터 출석요구를 받습니다. 다음날 토요일, 반나절이면 끝날 조사라 여기고 합동수사단에 출석한 임 목사는 영영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포고령 10호'에 근거해 곧바로 영장도 없이 불법 구금된 그는 조사 시작 사흘째 되던 21일 쓰러졌고 혼수상태에 빠진 채 부산 국군통합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닷새 뒤 사망했습니다. 그의 나이 59세였습니다. 임 목사의 부인은 사망 후 병원에 안치된 임 목사의 머리에 3cm 크기의 상처와 말라붙은 피를 봤다고 증언했습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와 법원 모두 "수사관들로부터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조사를 받다가 뇌출혈 등이 발생해 결국 사망에 이르렀다"고 인정했습니다.
 
부산 지역 민주화 운동의 거목이라 불렸던 그는 동시에 한 가정의 남편이자 아버지였습니다. 오늘의 '법정B컷'은, 임기윤 목사의 사망 이후 긴 세월 동안 경제적 어려움과 깊은 정신적 고통을 견뎌온 가족들이 43년 만에 국가를 상대로 책임을 묻고자 나선 법정 투쟁의 이야기를 따라가 보려 합니다.

국가 책임, 임기윤 목사에만 있고 유족엔 없다?

故 임기윤 목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캡처故 임기윤 목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캡처
유족들은 2023년 5월, 국가를 상대로 60억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이 소송은 지난 4월 9일 서울고등법원에서 항소심 판단까지 내려졌습니다.
 
1심 재판부는 지난해 7월 "수사관들의 불법체포 등 가혹행위로 임 목사와 가족들이 상당한 정신적 고통을 입었다"며 국가가 2억 1천만 원을 배상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임 목사에 대한 국가배상만 책임만을 인정한 것일 뿐, 유족에게는 고유의 위자료 청구권 자체가 없다고 봤습니다. '소멸시효'가 문제가 된 겁니다. 
▶'故 임기윤 목사 유족 손해배상 소송' 1심 판결문 中
'원고들 고유의 위자료 청구권'의 경우 소멸시효는 보상심의위원회의 보상금 지급 결정을 받은 날(1998.4.29경)로부터 진행된다고 봄이 타당하다. 이 사건 소는 그로부터 3년 이상이 지난 시점에 제기되었음이 기록상 명백하므로 망인의 가족들인 원고들의 위자료 청구권은 소 제기 전에 이미 시효로 소멸하였다.
임 목사는 1998년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심의위원회로부터 유공자로 인정받았습니다. 1심은 유족들이 이미 이때부터 국가의 불법행위를 인지했다고 판단했습니다. 국가배상청구권의 소멸시효는 '피해자 등이 손해를 안 날로부터 3년 이내(단기), 불법행위가 발생한 날로부터 5년 이내(장기)'입니다. 그 사이에 청구권을 행사하지 않으면 시효는 끝나고 청구권이 사라집니다.

항소심에서도 유족들의 청구권이 소멸하지 않았는지가 쟁점이 됐습니다. ①민법 166조 1항은 소멸시효를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때'로부터 진행한다고 규정하고, ②민법 766조 1항은 '손해 및 가해자를 안 날'로부터 3년간 이를 행사하지 아니하면 시효로 인해 소멸한다고 정합니다.

이를 근거로 유족 측은 '손해 및 가해자를 안 날'에 더해 그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때'가 와야 비로소 시효가 진행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때 권리를 행사한다는 것은 권리행사에 법률상의 장애사유가 없는 경우를 뜻합니다. 유족 측은 PPT까지 준비해 법정 변론을 펼쳤죠. 먼저 ①과 관련해 두 가지 주장을 내놓습니다.
▶2025.03.12 '故 임기윤 목사 유족 손해배상 소송' 항소심 변론 中
유족 측 이상희 변호사: 대법원이 전원합의체 판결(2018다212610)을 통해 위헌 무효인 국가 긴급권에 대한 국가 배상 책임이 인정되기 전까지는 손해배상 청구가 불가능했다고 주장하는 바입니다. (중략)
 
두 번째로는 헌법재판소에서 5·18 보상법 16조 2항 가운데 '5·18 민주화 운동과 관련해 입은 피해' 중 '정신적 손해' 관한 부분에 대해서 위헌 결정을 하기 전까지는 법률적 장애 사유가 있다는 주장입니다.
 
대법원은 2022년 8월 '박정희 정권'의 긴급조치 9호에 대해 국민 개개인에 대해 국가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립니다. 이는 '양승태 사법부'가 내렸던 "긴급조치권 발동은 '고도의 정치적 행위'이니 정치적 책임만을 질뿐"이라는 논리를 정반대로 뒤집은 판례였죠. 
 
임 목사 유족 측은 이 판례를 기준점으로 이전까지는 국가에 배상 책임을 묻는 권리를 실질적으로 행사할 수 없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법률적·제도적 변화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법률적 장애가 존재해 권리 행사 자체가 불가능한 상태였다는 겁니다. 임 목사를 불법 구금한 포고령 10호에 의한 불법 행위가, 긴급조치에 의한 불법 행위와 동일한 법적 논리를 보인다고도 주장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헌법재판소가 2021년 5월 5·18보상법 16조 2항 중 정신적 손해 관련 조항을 위헌으로 본 결정도 기준점이 된다고 했습니다. 해당 조항의 위헌 결정 이후에야 5·18 피해자가 정신적 손해에 대해서는 추가로 배상 청구를 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임 목사 유족 역시 당시 △국가 보상금 지급 결정에 동의했고 △위원회가 유족들의 사정도 고려해 보상금을 지급한 것으로 보이는 만큼 헌재의 판단 전까지 권리행사에 법률적 장애가 있었다고 여겼다는 겁니다. 
 
유족 측은 ②와 관련해서도 긴급조치권의 발령과 집행이 위헌이라는 대법원 판결이 나온 2022년 8월 30일을 소멸시효 기산점으로 삼아야 한다는 논리도 다시금 폈습니다. 또 수원지방법원에서 포고령 10호가 위법이다는 첫 법원 판단이 나온 2020년 5월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도 했습니다. 이처럼 손해를 안 날이 비교적 최근이기에 2023년 5월에도 여전히 청구권이 살아있었다는 겁니다. 

'30초 만'에 끝난 항소심 판결

수십 년이 지나 국가의 책임을 묻는 유족, 이들의 주장은 받아들여졌을까요. 봄 날씨라고 하기엔 다소 쌀쌀했던 지난 9일 항소심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원고들와 피고의 항소를 모두 기각한다. 항소비용은 각자 부담한다" 40년을 훌쩍 넘겨 나온 항소심 판결은 단 30초 만에 끝났고, 법정에선 이유도 들을 수 없었습니다.
 
항소심 재판부도 유족들에겐 고유의 위자료 청구권이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1심과 마찬가지로 임 목사가 1998년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고 보상금을 지급받았을 당시, 이미 유족들이 국가의 불법행위를 인식했다고 봐야 한다는 입장을 유지한 것입니다. 재판부는 설령 그 시점이 아니라 하더라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2001년 임 목사의 죽음을 위법한 공권력에 의한 것으로 판단한 시점부터는 소멸시효 시계가 흘러갔다고 봤습니다. 
▶서울고등법원 민사 12-3부(김용석·장석조·배광국) 2심 판결문 中
관련자의 가족은 진실 규명의 어려움이나 강압적인 사회 분위기 등으로 인해 피고(대한민국)의 위법한 가해행위에 관해 자신들의 고유한 위자료를 청구하기가 사실상 곤란하였을 수도 있으나, 구 민주화운동 보상법의 제정 이후로는 그와 같은 사실상의 장애가 소멸하게 됐다고 볼 여지가 상당하다. (중략)
 
적어도 원고들이 보상심의위원회로부터 보상금을 수령할 무렵에는 계엄 포고가 피고의 불법행위라는 점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뤄졌고 망인의 사망에 대한 사실관계도 어느 정도 규명돼 원고들이 불법행위에 관한 손해 및 가해자를 현실적이고도 구체적으로 인식할 수 있었다고 보이고…
유족의 고통에는 유효기간이 없지만, 법의 시계는 매정했습니다. 항소심 선고 후 법정을 빠져나온 임 목사의 막내아들은 "수고했습니다"란 말만 남긴 채 허탈함을 숨기지 못했습니다.

유족 측은 1심이 임 목사의 위자료 청구권만 인정하고, 유족들의 위자료 청구권은 소멸했다고 판단한 것을 두고 평등권에 위반된다는 주장도 했지만, 2심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2심은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2022년에 긴급조치 사건에 대해 국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판례가 나온 이후에서야 비로소 유족들이 국가에 책임을 묻는 소송을 제기할 수 있게 되었다는 주장에 대해, 아무런 구체적 판단을 내놓지 않았습니다. 

고리대금까지 몰린 삶…법은 침묵했다

변호사들은 법정에서 유족들의 고통을 세심히 살펴봐 달라며 재판부를 향해 고개 숙였습니다. 유사 사건과의 형평성 차원에서 위자료 액수도 지나치게 낮게 책정됐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2025.03.12 '故 임기윤 목사 유족 손해배상 소송' 항소심 변론 中
유족 측 양성우 변호사: 지금은 이 사건으로 인해서 사실은 제대로 된 기억과, 나이가 고령이 아님에도 요양병원에 입원하셔서 의사소통할 수 없는 상황에 있습니다. 과거사 사건에 맞서 싸우다 돌아가신 부친의 죽음으로 인해 한 가정이 어떻게 파괴되고, 어떠한 고통을 받아왔고, 지금도 고통이 유지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 원고들에게 정당한 보상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유족 측 이상희 변호사: 목사님 사망으로 인한 피해가 고스란히 다 가족에게 이어졌습니다. 그런 부분을 감안해서 국가 폭력이 당사자와 피해자에게 미친 영향을 살펴서 엄정하게 국가 책임을 인정해 주시길 진심으로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러나 법원은 유족의 '고통'엔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국가가 임 목사의 목숨을 앗아간 후, 남은 가족들은 사회적·경제적 피해를 고스란히 감당해야 했습니다. 부인은 대학생 자녀들의 학비와 생계를 책임지려 노력했지만, 가난을 떨치진 못했고 사기를 당하기도, 고리대금업자에게 돈을 빌리다 빚도 늘었습니다. 

요양병원에 머무는 임 목사의 딸은 이제 많은 기억을 잊었지만, '5·18'이라는 단어만큼은 여전히 또렷하게 기억한다고 합니다. 국가폭력의 기억은, 시간이 지나도 퇴색하지 않고 더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겁니다. 유족 측은 대법원 판단을 받아보겠다고 했습니다. 대법원은 유족의 고통을 얼마나 따져봐 줄까요. 

유족 측은 항소심 단계에서 재판부에 이런 말을 전했습니다. "임기윤 목사의 사망은 내란의 폭동 행위로 이루어진 비상계엄의 확대와 이 사건 계엄 포고로 인해 발생한 것이 명백한 이상, 국가는 마땅이 책임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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