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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동지 김구와 전덕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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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제주CBS는 광복 79주년을 맞아 이준 열사의 구국운동을 소개한다. 이준 열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법률학교 1회 졸업생으로 한성재판소 검사보로 취임했지만 윗사람들의 비행을 탄핵하다 면관됐다. 이후 기독교로 개종한 후 구국운동을 펼쳤다. 광복은 선열들의 뜨거운 독립운동을 통해 이뤄졌다. 독립운동가 후손인 이양재 선생의 기고를 통해 이준 열사가 펼쳤던 독립운동과 이 시대 광복의 의미를 찾아본다.

[이준 열사와 그 동지들③]

김구 자서전 백범일지.  도서출판 국사원 제공김구 자서전 백범일지.  도서출판 국사원 제공
▶ 글 싣는 순서
① 이준 열사, 기독교로 개종하다
② 이준 열사, 서재필과 입헌정치·공화정 추구
③ 신앙 동지 김구와 전덕기 목사
(계속)

1896년 전덕기(全德基, 1875~1914)는 스크랜턴의 신앙과 헌신에 감화돼 감리교 상동교회에 입교한다. 그는 독립협회의 목적인 자주독립⦁자유민권사상과 자강개혁운동(自强改革運動)이 기독교 복음의 내용과 일치함을 깨닫고, 독립협회에 가입한 후 서무가 되어 당시의 이동녕 이승만 박용만 등과 친교를 맺는다.
 
독립협회가 해산된 뒤에는 스크랜턴을 도와 상동교회에서 목회에 전념한다. 이준이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896년 이전이지만, 평생 동지로 만난 것은 1898년 9월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서 활동하면서다. 전덕기는 1902년 감리교 선교회에서 전도사로 임명받고 본격적인 목회에 나서며, 이준을 상동교회의 '전국감리교청년회연합회'(엡윗청년회, Epworth League) 청년회장으로 선임한다.
 
1905년 6월에는 제1차 미 감리회 한국선교연회에서 M.C. 해리스 감독에게 '집사 목사'로 안수를 받는다. 그는 그해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엡윗청년회를 소집해 이들을 중심으로 을사늑약 무효투쟁을 강하게 전개했다. 당시를 백범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그때(11월 27일) 상동교회에서 전덕기 등 교회 지도자들이 모여 상소를 올리기로 결정하였다. 이준이 상소문을 짓고, 평양의 최재학을 선두로 다섯 대표가 서명하였다. 상소하면 사형될 것이요. 사형되면 다시 다섯 사람씩 몇 차례든 계속 상소할 계획이었다. 정순만이 교회당에서 맹세의 기도를 인도하고, 모두 대한문 앞으로 나아갔다. 서명한 다섯 사람이 궐문 밖에서 형식상 회의를 열고 상소를 의결하였지만, 상소장은 벌써 별감들의 협조로 상감께 올려졌다. 그런데 갑자기 왜놈 순사대가 달려왔다, 다섯 사람이 일시에 순사들을 향해 달려들며 내정 간섭을 규탄하였다. 왜놈들의 칼이 번뜩 거리는 가운데 다섯 지사는 맨주먹으로 싸웠다. 우리는 근처에서 그들을 호위하며, '왜놈이 국권을 강탈하고 조약을 강제로 체결하는데, 우리 인민은 원수의 노예가 되어 살 것인가, 의롭게 죽을 것인가?'하고 벽력같이 소리를 질러댔다. 다섯 지사는 경무청에 감금되었지만 신문하는 것을 보니 훈방할 모양이다.‥‥‥" (김구 지음, 도진순 엮어 옮김, <쉽게 읽는 백범 일지> p.p.136〜137에서 인용, 2005년, 서울, 돌베게 발행.)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전국 각지의 교회는 구국 철야 기도회와 금식기도회를 열었다. 상동교회의 전덕기가 엡윗청년회를 소집하자, 각 지역 감리교회의 엡윗회원들이 상동교회로 모여들었는데, 진남포 엡윗청년회의 대표로는 김구가, 상동교회 엡윗청년회의 대표로는 이준이 참석했으며 이동녕과 조성환도 왔다.
 
당시 전덕기는 엡윗청년회원 5명씩을 한 반으로 편성했다. 한 반이 가서 상소하다 잡혀 들어가면 또 한 반이 가서 상소를 올리자는 것이다. 그리하여 제1반으로 최재학, 이준, 김구 등이 기도를 드린 후 대한문으로 가서 고종 황제께 이준이 짓고 쓴 상소문을 올렸다.
 
그러나 무장한 왜병들과의 충돌로 인해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이러한 동지와의 투쟁을 인연으로 백범 김구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공식 행사에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신앙의 동지애로 이준의 희생을 말했다.
 
이후 전덕기는 상동교회를 '민족운동의 요람'으로 만들고 이준 이회영 등과 더불어 상동교회 지하실에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 파견을 추진한다. 또한 그는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한다.
 
그러나 전덕기는 1912년 '105인 사건(신민회 사건)'으로 구속돼 심한 고문을 받은 끝에 지병이 악화해 1914년 3월 23일 39세로 사망한다. 전덕기와 이준은 신앙을 근본으로 한 구국독립운동의 동지로서 하나님과 조국의 제단 앞에 저마다의 고귀한 생명을 바쳤다.

△ 글쓴이 이양재(69) 선생=독립운동가 이병식 선생의 증손자로 (재)리준만국평화재단 이사장과 (사)한국고서협회 상임부회장으로 고서화감정가이다. 서지학과 회화사학자로 2009년부터 제주에 머물며 제주관련 고서도 수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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