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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기독교청년회 최대 후원자 민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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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제주CBS는 광복 79주년을 맞아 이준 열사의 구국운동을 소개한다. 이준 열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법률학교 1회 졸업생으로 한성재판소 검사보로 취임했지만 윗사람들의 비행을 탄핵하다 면관됐다. 이후 기독교로 개종한 후 구국운동을 펼쳤다. 광복은 선열들의 뜨거운 독립운동을 통해 이뤄졌다. 독립운동가 후손인 이양재 선생의 기고를 통해 이준 열사가 펼쳤던 독립운동과 이 시대 광복의 의미를 찾아본다.

[이준 열사와 그 동지들⑥]

민영환과 혈죽. 독자 제공민영환과 혈죽. 독자 제공
▶ 글 싣는 순서
①이준 열사, 기독교로 개종하다
②이준 열사, 서재필과 입헌정치·공화정 추구
③신앙 동지 김구와 전덕기 목사
④게일 목사와 국민교육회 동지들
⑤동기동창이자 절친 함태영 목사
⑥황성기독교청년회 최대 후원자 민영환
(계속)

민영환(1861~1905)은 고종(재위 1864~1907)의 외사촌 동생이다. 고종의 어머니 여흥부대부인의 남동생 민겸호(1838~1882)가 민영환의 생부이기 때문이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때 전봉준은 그를 탐오관리로 지목해 처단대상에 올렸다. 그러던 그가 1896년 군부대신으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 축하사절단을 인솔해 미국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등 당시의 서구 열강을 순회한 후 러시아에 간다. 당시 민영환은 6개월 20일간 이들 서구 열강의 발전된 문물과 제도를 보고 충격을 받아 개화와 개혁을 절감하게 된다.
 
민영환은 1898년경부터 이상재 이준 전덕기 등 독립협회의 임원들과 연결을 갖고 독립협회를 후원해 '독립·자강 운동'을 적극 지지하고 민권의 신장과 의회의 설치 등 정치개혁여론을 선도한다.

1902년에는 이상재 이상설 이준 이동휘 양기탁 등과 비밀결사 개혁당(改革黨)을 조직하는데,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제를 수립하려 한다."라는 황국협회의 모함으로 군부대신 겸 내무대신의 자리에서 탄핵 파직된다. 하지만 그는 고종의 외사촌이어서 곧 복직되어 참정대신, 탁지부대신 등의 여러 중요한 직책을 역임한다.
 
1903년에 YMCA가 대한제국에 들어왔는데, 당시의 YMCA는 개신교 선교와 서양문화유입에 큰 역할을 한다. 민영환은 YMCA의 가장 열렬한 후원자로 나서서 황실에서 지원금을 받아 내고, 또한 직접 막대한 후원을 한다. 1907년에 나온 『대한황성종로기독교청년회』란 소책자에 민영환의 후원 사실을 명시한 바 있다.
 
민영환이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 직후 30일 자결하던 시기에 이준은 중국 상해에 출장갔다가 귀국 길에 있었다. 한성에 도착한 이준은 후원자이자 동지였던 민영환의 공평동 집으로 달려가 이상설과 함께 방성대곡(放聲大哭)한다.
 
당시 민영환이 남긴 유서에 "슬프다, 국가와 민족의 치욕에 이에 이르렀으니 우리 인민은 장차 생존경쟁 속에서 다 죽게만 되었구나. 대저 구차히 살고자하는 자는 반드시 죽고 죽기를 각오하는 자는 도리어 살아날 길이 있는 것이니, 동포 여러분은 어찌 이를 모르리오. 영환은 한갓 죽음으로써 임금의 은혜를 갚고 2천만 동포 형제에게 사죄하노라‥‥‥." 이 유서 중에 "구차히 살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죽고 죽기를 각오하는 자는 도리어 살아날 길이 있는 것이니"라는 구절이 있다.
 
요한복음 12장 25절에는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는 말씀이 있다.

분명 민영환은 이 말씀을 접하고 있었다. 민영환은 당대 제일의 권문세가임에도 불구하고 망국에 처한 울분을 죽음으로써 외쳐 세간의 존경을 받았다. 자신의 자결로서 독립과 민족 항쟁의 불씨를 남겼기에, 지금 우리 민족의 가슴속에서 영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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