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사람 관계가 좋았다가 나빴다가 하는게 인지상정이라고는 하지만 찰떡같이 붙어다녔던 '브로맨스'(bromance)가 이렇게까지 파국을 연출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트럼프·머스크 말이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자타 공인 트럼프 재집권의 '1등 공신'이던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에게 트럼프 대통령이 등을 돌렸고, 관계 회복은 요원해 보인다.
지난 11월 대선 승리 연설에서 트럼프는 "우리에게 새로운 스타가 생겼다"며 머스크를 특별히 지목해 추켜세웠다.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새로운 황태자 탄생 장면이었다.
지난해 트럼프 암살 미수 사건을 계기로 머스크는 트럼프 공개 지지를 선언한 후 트럼프측에 2억5천만달러 이상을 기부하는 등 트럼프의 당선을 위해 말 그대로 '올인'했다.
이에 부응하듯 트럼프는 1기때와는 달리 머스크를 신설한 정부효율부 수장에 앉히는 등 실리콘밸리 빅테크 인사들을 대거 중용했다.
데이비드 색스 전 페이팔 공동창업자를 암호 화폐 차르로 임명했고, 정보기술(IT) 전문가 스리람 크리슈난을 백악관 인공지능(AI) 수석 정책고문으로 택했다.
대선 후 논공행상이 한창일 때 이런 일이 벌어지면서 트럼프의 전통적 지지 세력인 마가(MAGA)의 심기가 불편해졌다.
이처럼 트럼프가 핵심 지지 세력인 백인 노동자 계층(MAGA)과 머스크와 같은 기술자유주의 억만장자(빅테크) 사이에 끼이면서 갈등의 불씨가 잉태된 것이다.
연합뉴스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유명한 사진이 있다.
트럼프는 대선 한달을 남겨두고 대규모 유세 장소로 펜실베이니아주 버틀러 팜쇼를 찾았는데, 이곳은 다름 아닌 석달 전 자신에 대한 암살미수사건이 벌어졌던 곳이다.
암살 시도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기 때문에 두번 다시는 쳐다보기도 싫은 장소일 수도 있겠지만, 트럼프는 이를 역으로 이용해 구름떼와 같은 마가들이 전국에서 몰려들었다.
특히 이날 머스크도 연단에 올랐는데, 트럼프 지지 연설을 한후 트럼프 후보 옆에서 껑충껑충 뛰었다. 수많은 마가들 앞에서의 데뷔전인 셈이었는데 뭔가 어색하고 이질적이어서 어울리지 않는다는 평가도 나왔다.
실제 머스크와 마가 간 '불안한 동거'는 오래 가지 않았다.
트럼프 취임도 전인 지난해 12월 이들은 미국 노동시장에서 외국인 숙련노동자의 위치를 놓고 힘대결을 벌였다.
이때 마가는 인도 출신의 크리슈난의 AI 고문 임명과 관련해 능력 대신 이민 정책에 대한 그의 입장에 대해 딴죽을 걸었다.
크리슈난은 머스크와 마찬가지로 "이민이 미국 경제의 역동성을 이끄는 동력"이라며 미국 전문직 비자(H-1B) 확대에 긍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마가는 "이민 확대가 결국은 미국인의 일자리를 빼앗는다"며 H-1B에 반대했지만, 속내는 인도계인 크리슈난의 백악관 입성이 갖는 상징성을 폄훼하려는 의도도 없지 않았다.
마가들은 "트럼프의 미국우선주의 의제에 정반대되는 견해를 공유하면서 현재 트럼프정부에서 일하도록 임명된 많은 커리어 좌파들을 보는 것은 걱정스러운 일"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머스크는 이같은 주장에 대해 "이 문제를 놓고 마가와 전쟁에 들어갈 것"이라고 선전포고를 했고, 색스 암호화폐 차르도 이에 동조했다. 머스크와 색스는 모두 남아공 출신 미국 시민권자이다.
내부에서 이같은 논쟁이 계속되자 당시 트럼프 당선인은 "H-1B는 훌륭한 프로그램이고 나는 이를 항상 지지해 왔다"며 일단 머스크와 빅테크의 손을 들어줬다.
연합뉴스하지만 이번 매듭으로 트럼프의 전통적 지지층과 대선 과정에서 엄청난 선거자금을 대면서 유입된 빅테크간의 주도권 싸움이 쉽게 끝날 것이라고 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한지붕 두가족'이 또 한번 충돌한 것은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상징으로 불리는 '하나의 크고 아름다운 법안(One Big, Beautiful Bill Act)'으로 이름 붙여진 감세법안이었다.
이 법안의 핵심은 개인 및 기업에 대한 세금 감면을 영구화하는 것이다. 법안은 개인 소득세율 인하, 법인세 최고세율 인하, 표준소득공제와 자녀세액공제 확대 등 2017년 감세법에 따라 시행돼 왔으나 올해 말 종료될 예정인 감세 정책을 연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마가 진영은 해당 법안에 역사상 가장 강력한 이민 단속 및 추방을 위한 예산이 포함돼 있는 것을 자랑으로 내세우고 있었다.
그러니 이같은 법안을 대놓고 반대하는 머스크가 좋게 보일 리가 없는 것이었다.
머스크는 해당 법안으로 테크 분야 보조금이나 투자 삭감 등 기술혁신 관련 축소를 우려하며 "대규모 재정적자를 유발 시킬 것"이라고 트럼프가 애지중지하는 상징을 평가절하했다.
여기다 머스크는 트럼프의 관세 정책에도 줄곧 반기를 들어왔다. 안 그래도 그의 일관성 없는 관세 정책으로 인해 월가로부터도 '타코'(TACO·Trump Always Chickens Out)라고 놀림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트럼프의 인내심도 바닥이 드러났다.
이런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에는 머스크가 아닌 마가의 손을 들어줬다.
연합뉴스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말 백악관을 떠나는 머스크의 공식 환송 행사에 앞서 머스크의 측근이자 차기 항공우주국 국장 후보였던 재러드 아이잭맨을 낙마시켰다.
머스크는 스페이스X 등 자신의 사업에도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아이잭맨의 지명철회에 큰 좌절감을 맛봤고, 이후 둘 사이에 온라인 설전까지 벌어지면서 도저히 회복될 수 없는 관계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일각에서는 머스크가 화해 제스처를 취하고 있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여전히 완강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어 예전같은 관계로 돌아가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머스크가 "트럼프 대통령 임기는 3.5년 남았지만 나는 40년간 이 자리에 있을 것"이라고 말한 부분이 묘한 뒷맛을 남긴다.
또한 머스크는 "감세법안이 상원을 통과하지 못하도록 의원들을 설득하겠다"며 "중도층 80%를 대변할 새로운 당이 필요하다"고도 했다.
실제 감세법안이 상원을 통과하지 못할 경우 트럼프 대통령에게는 정치적 타격이 불가피하고, 머스크가 창당할 경우 내년 중간선거 등에서도 작지 않은 변수가 될 수 있다.
이에 마가 진영에서는 "머스크가 감옥 안에서 40년간 있는 게 어떤 것인지 알았으면 좋겠다"고 경고하고 나섰다. 트럼프 승리의 '1등 공신'이 이제는 마가 진영의 십자포화 앞에 선 셈이 됐다.
기다렸다는 듯이 미국 정치권에서 '제3정당' 운동을 벌이고 있는 세력들이 머스크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결별의 후폭풍이 '찻잔 속의 태풍'이 될지, 쓰나미가 될지는 좀 더 지켜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