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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말년의 비참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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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9-03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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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바초프 전 소련 공산당 서기장. 연합뉴스고르바초프 전 소련 공산당 서기장. 연합뉴스
고르바초프 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다른 민족은 해방시켰지만 정작 자신의 제국을 잃었다는 이유로 러시아 내에서 지금까지도 인기가 없다. 심지어 배신자에 매국노라고까지 한다. 뭐 그렇게까지 부를 일인가 싶은 게, 그의 정치적 결단 중 상당수는 인류에 나쁘지 않은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스타워즈'라고 불린 미국의 전략방위구상(SDI)에 맞서지 않고 군축을 결심한 게 대표적이다. 오늘은 치약이, 내일은 칫솔이 없는 상황으로 인민의 생활이 하루가 다르게 나빠지는데, 허황되고 호화찬란한 경쟁국의 군비 확장에 대응한답시고 자원을 투자할 필요가 없다고 본 것이다. 기득권층 해체를 위한 복수정당 허용이라든지 독일 통일의 불가피성을 인정한 것도 그가 가진 통찰력과 인내심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지난 1987년 미국 워싱턴에서 정상회담한 미하일 고르바초프(왼쪽) 당시 소련 대통령과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 연합뉴스지난 1987년 미국 워싱턴에서 정상회담한 미하일 고르바초프(왼쪽) 당시 소련 대통령과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 연합뉴스
냉전을 거치며 '악의 제국'이었던 나라의 지도자는 이렇게 서방 세계를 열광시켰고, 고르바초프는 "마법사, 슈퍼스타, 계산된 무질서의 관리자, 천재적 정치인, 세계의 조정사(타임지)"라는 찬사를 받았다. 자국에서 받지 못한 사랑을 유럽에서 받는 그의 기분은 어땠을까. 후대의 역사에서 제대로 평가받을 것을 기대하며 쓴 침을 삼켰을까. 대신 그는 러시아에 버림받은 뒤 회고록(Memoirs 1995) 등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구구절절 변명하는 책을 써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더욱 확실하게 조국으로부터 일말의 사랑마저 잃었으며 서방에게는 측은한 존재가 돼버렸다. 시대에 대한 통찰력은 있었으나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참을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고르바초프가 후대의 역사와 사후의 명성을 생각했다면 자기정당화와 자기변명적 내용으로 빼곡한 책을 쓰는 것을 다시 생각했었을 것이다. 명목상이긴 하지만 노동을 중시하는 사회주의 국가 출신 인물이 돈 냄새가 진동하는 강연회를 다니며 고액의 강연료를 받는다거나 기념식, 제막식 등 각종 행사에 '그럴듯한 하객'으로 참여하는 것 역시 멀리했을 것이다. 세계의 유혈사태를 막은 인물이 다른 욕심도 아니고 재물 욕심에 변명하기 급급한 소인배로 인식되다니, 말년의 비참이 별 건가.

12·3 불법계엄 사태로 특검 수사를 받는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 7월 9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마치고 대기 장소인 서울구치소로 이동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12·3 불법계엄 사태로 특검 수사를 받는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 7월 9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마치고 대기 장소인 서울구치소로 이동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고르바초프의 비참한 말년에 대해 길게 쓴 이유는, 윤석열이라는 한 때 대한민국 최고 권력, 매우 짧은 기간이긴 했지만 '공정과 상식의 아이콘'이 특검 조사에 응하지 않는다며 떼를 쓰는 모습에서 말년의 비참이 겹쳐보였기 때문이다. 여전히 윤어게인을 외치는 일부 그룹의 바람처럼 윤석열이 "역사적 재평가가 있을 것(김민수 국힘 최고위원)"이라 기대한다면, 차라리 독방에서 단정한 자세로 앉아있다 특검 소환에 꼿꼿하게 응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나았을 것이다. 지구의 절반을 이념에서 해방시킨 인물조차 말년의 향연과 변명 때문에 이미지가 추락했는데, 감히 친위쿠데타를 일으킨 사람이 이런 패악질을 부린다니. 그것도 "당신, 검사 해봤어?" 류의, TV드라마의 매력없는 평면적 빌런이 내뱉을 법한 대사를 치면서 말이다. 더 떨어질 품격이라는 게 있는가.

윤석열이 말년의 비참을 최소화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구차한 변명이 아닌 처절한 반성일 수밖에 없다. 이게 너무 큰 목표라면, 그에게 위안이 된다는, 팬레터를 보내는 2030에게라도 멋있어 보이는 방법도 있다. 그저 힘만을 숭배하는 그들은, 죽을 때까지 한 마리 외로운 사자처럼 독방에 홀로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 윤석열의 모습을 천년의 신화로 만들어낼 거다. 물론 이 신화에서 그는 속옷차림이 아니라 수의를 제대로 입고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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