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현지시간) 미 조지아주 포크스턴의 이민세관단속국(ICE) 구금시설 앞에서 관계사 직원들이 면담을 기다리고 있다. 연합뉴스현대차그룹·LG에너지솔루션 미국 배터리 공장(HL-GA 배터리 회사)에서 한국인 수백명이 불법체류 혐의로 체포되는 초대형 참사가 발생한 배경을 두고 재계에선 20년 가까이 공전된 '한국인 미국 전문직 비자 쿼더 확대'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편법적 출장 관행은 문제지만 그 배경엔 장기간 공전한 한미 비자 관련 논의가 있다는 것이다.
정부는 대미 투자 기업들과 긴급 간담회를 열고 의견을 수렴하는 등 비자 체계 점검 및 개선 방안을 추진한다는 방침이다.
'美와 FTA체결'싱가포르·호주엔 있지만 韓은 없는 전문직 비자
미국 이민당국이 공개한 현대차-LG엔솔 이민단속 현장. 미국 이민세관단속국 홈페이지 캡처재계 관계자는 CBS노컷뉴스와의 통화에서 "기업들은 정부에 꾸준히 미국 비자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정부가 이를 중요 정책 과제로 두고 대응한 적이 있었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재계는 지난 2007년 한미 FTA 체결을 전후로 한미 정부에 미국 비자 문제 해결을 요청해왔다.
미국에서 합법적으로 일하려면 전문직 취업 비자(H-1B)나 주재원 비자(L1·E2), 단기 상용 비자 (B1) 등을 발급받아야 한다. 연간 H1B 비자 발급 건수가 8만 5천개로 제한된 데 비해 세계적으로 신청자는 50만명에 육박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B1의 비자 거절 확률은 지난해 기준 27.8%이고, 매년 3월에만 지원할 수 있는 H-1B는 신청자 10명 중 1명도 합격하지 못한다.
싱가포르와 호주 정부는 미국과 FTA 등을 통해 수천건에서 1만여건의 쿼터를 확보하고 있지만 한국은 미국과 FTA 협상 당시 이런 요구를 관철하지 못했다. 이후 외교부 등이 최대 1만5천개의 한국인 전문인력 취업비자 E-4 신설을 위해 미국 내 입법에 힘써왔지만 법안은 의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또 다른 재계 관계자는 "개별 기업 차원에서는 물론 경제 단체 등을 통해 정부와 의원실 등에 관련 비자 쿼터 확대나 전문인력 비자 신설 등을 꾸준히 요구하고 있지만 20년 가까이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도널트 트럼프 2기 정부 출범 직후인 올해 1월에도 한국경제인협회는 정인교 당시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을 초청해 '글로벌 경제 현안대응 임원협의회'를 열고 대미 투자 기업들의 가장 큰 애로 요인으로 꼽히는 미국 전문직 비자(H-1B비자) 쿼터 확대 요청 등을 요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문제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ESTA 등을 통한 출장 등 관행과 편법이 이뤄졌단 것이다.
한 재계 관계자는 "관행이라도 해도 편법은 잘못"이라면서도 "기업들의 꾸준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제대로 관심을 가졌는지 아쉬운 대목"이라고 말했다.
비자 문제, 한미 간 주요 의제로 급부상…"이번엔 다를까"
미국 이민 단속 당국이 공개한 조지아주 배터리 공장 건설현장 단속 모습. 미국 이민세관단속국 홈페이지 캡처한미 정부의 외면 속 지지부진했던 한국인 미국 전문직 비자 문제가 한국인 수백명이 불법체류 혐의로 구금되는 초유의 사태로 주목받으면서 재계 일각에선 이번 사태를 계기로 비자 문제 논의가 물꼬를 틀 수 있을지 주목하고 있다.
지난 4일(현지시간) 미국 이민세관단속국(ICE)과 국토안보수사국(HSI) 등은 조지아주 앨라벨에 위치한 HL-GA 배터리회사 건설 현장에서 대대적인 불법체류자 단속을 벌였고, LG에너지솔루션 소속 47명(한국 국적 46명·인도네시아 국적 1명)과, HL-GA 배터리회사 관련 설비 협력사 소속 인원 250여명이 구금된 상태다.
이와 관련해 한국에선 물론 미국에서도 '미국 최대 투자처인 한국 기업의 신뢰가 훼손됐다'는 우려가 나온다.
의회아시아태평양계 코커스 소속 민주당 의원들과 조지아주의 민주당 하원의원들은 6일 공동성명을 통해 "이런 무분별한 조치는경제를 침체시키며 글로벌 파트너들의 신뢰를 훼손한다"고 우려를 표했다.
뉴욕타임즈 등 현지 언론도 "한국 기업들은 2023년 기준 미국 신규 프로젝트에 대한 최고의 외국인 투자자인데 한미 관계 전문가들은 이번 공급이 신뢰를 훼손하는 등 해로운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고 전했다.
정부도 이번 사태를 계기로 비자 문제 해결에 나선 상태다. 강훈식 대통령실 비서실장은 지난 7일 근로자 석방 교섭이 마무리됐고 행정적 절차를 마치는 대로 전세기를 보낼 예정이라며 "유사사례 방지를 위해 대미 프로젝트 관련 출장자의 비자 체계 점검·개선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여한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도 8일 "관련 현황을 파악하고 업계 의견을 수렴할 것이며 향후 외교부 등 관계 부처와 협조해서 제도 개선 방안을 모색하도록 하겠다"고 설명했다.
산업부는 같은날 박종원 통상차관보 주재 간담회에 현대차그룹, LG에너지솔루션, SK온, 삼성SDI, 삼성전자, SK하이닉스, LG화학, HD현대, 한화솔루션, LS 등 대미 투자를 진행 중인 기업들과 긴급 간담회를 열고 비자 체계 점검을 진행하기도 했다.
한 기업 관계자는 "비자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데에는 미국 의회 등 미국 내에서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크지 않았던 부분도 한 몫했을 것"이라며 "이번 사태로 한미 정부가 이 문제의 중요성을 이전보다는 크게 인지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