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단속으로 체포됐던 현대차-LG엔솔 배터리공장 건설 현장 직원들이 애틀랜타 공항으로 향하기 위해 11일(현지시간) 미국 조지아주 포크스턴의 이민세관단속국(ICE) 구금시설을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미국 조지아주(州)의 한국 기업 공장 건설 현장에 대한 미 정부의 과격 단속 사태가 한국인 300여명의 석방으로 수습 국면에 들어섰지만, 체류 안정성을 보장하는 명확한 조치가 나오기 전까지는 공사 지연 등 당분간 타격이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대미(對美) 투자를 확대한 기업들 사이에서 "여전히 상황이 마무리 됐다고 보지 않는다"는 신중론이 나오는 가운데, 이재명 대통령도 "기업들이 매우 당황스러운 상태"라며 우회적으로 미국에 불만을 표한 만큼 이번 사태를 계기로 미국의 고압적 정책이 정상화 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군사작전 방불케 한 초유의 대규모 구금 사태…일주일 만에 일단락
미국 이민당국의 무문별한 단속에 구금됐던 한국인 316명과 외국인 14명 등 330명은 구금 일주일 만인 11일(현지시간) 새벽 조지아주 남부 포크스턴의 이민세관단속국(ICE) 구금시설에서 석방돼 한국행 전세기에 올랐다. 결박 등 신체 구금 없이 평상복 차림으로 시설에서 나온 이들은 한국시간으로 12일 오후에 인천공항에 도착할 예정이다.
이들은 현대차그룹과 LG에너지솔루션이 수조 원을 들인 대미 투자 배터리 공장 건설에 참여했다가 문자 그대로 봉변을 당했다. ICE와 국토안보수사국 등은 지난 4일 근로자들의 체류 자격을 빌미로 헬기와 장갑차, 완전무장 인력까지 동원해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현장 단속을 강행했고, 이들을 구금했다. ICE 등은 쇠사슬에 묶인 한국인들의 모습이 담긴 단속 영상까지 여과없이 공개했다.
한국 정부, 기업의 항의와 한미 관계 장관 접촉 끝에 당초 9일로 예정됐던 석방 절차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돌발 제안으로 갑자기 지연되는 등 이번 사태는 말미까지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의 연속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구금됐던 한국 인력이 미국에 잔류해 현지인들을 교육·훈련시키는 게 어떻겠느냐는 취지로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입장에선 배려라고 보기 어려운 제안이었던 셈이다.
이 대통령은 한국인에 대한 석방 결정이 가까스로 내려진 뒤 진행된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미국에 진출한 우리 기업들이 매우 당황스러운 상태일 것"이라며 "현지에 공장을 세우는 게 앞으로 온갖 불이익 등으로 어려워 질텐데, '이걸 해야 하나'라는 고민을 안 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게 아마도 앞으로 대미 직접 투자에 상당히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말했다.
미 정부의 공격적인 관세 정책 등에 대응하는 차원에서 대규모 현지 투자를 감행하고 있는 기업들의 입장을 언급하며 미국 측에 불만을 드러낸 것으로 풀이됐다.
기업들 타격 불가피…트럼프發 불확실성, 미국 내에서도 비판
조지아주 현대차그룹-LG에너지솔루션 합작 배터리 공장. 연합뉴스한국인 수백명 구금 사태는 수습 국면에 접어들었지만 이와 별개로 관련 기업들의 손실은 당분간 이어질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당장 단속 표적이 됐던 현대차그룹·LG에너지솔루션의 미국 조지아주 배터리 합작 공장(HL-GA 배터리 회사)은 구금됐던 핵심 인력들이 재정비 시간을 갖기까지 건설 지연이 불가피하다.
약 6조 원이 투자된 이 공장은 현대차그룹의 전기차 공장 메타플랜트 아메리카(HMGMA)가 위치한 조지아주 서배너 브라이언 카운티에 올해 연말 완공, 내년 양산을 목표로 지어지고 있었다. 건물은 거의 완공됐고, 내부 생산 장비 설치 공정이 진행되는 등 막바지 작업중이었지만 이번 사태로 양산 일정은 연기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HL-GA 공장에서 생산된 배터리 셀은 현대모비스가 배터리 팩으로 제작한 뒤 현대차그룹의 미국 공장 생산 전기차에 전량 공급될 예정으로, 공장 건설에 여러 공급 계획이 얽혀있는 구조로 현대차 역시 이번 사태에 따른 타격이 예상된다.
LG에너지솔루션은 이 밖에도 미국에 3개 공장을 추가 건설 중인데, 이번 사태로 해당 건설에 투입됐던 일부 인력을 복귀시키거나 숙소에 대기 조치하는 등 '여진'도 이어지고 있다. 다만 HL-GA 공장과 달리 나머지 3개 공장의 건설은 미국 시공사가 주도하고 있어 상대적으로 우려가 덜 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들 외에 텍사스주에 반도체 파운드리(위탁생산) 공장을 짓고 있는 삼성전자와 한미 조선업 협력 프로젝트인 '마스가 프로젝트'와 관련된 국내 조선 업계 등도 이번 사태가 어떻게 정책적으로 매듭지어질지 예의주시하는 기류다.
재계 관계자는 "한국 근로자들의 체류 문제가 명확하게 해결돼야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라며 "미국 정부가 외국 투자 유치를 추진하면서도 그와 양립하기 어려운 정책들을 구사하면서 혼란이 가중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미국 내에서도 우려가 나온다. 미국 워싱턴포스트(WP)는 한국인 구금 사태와 관련해 "수천 개의 제조업 일자리가 사라질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완공되면 수많은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공장의 건설이 이번 사태로 차질을 빚을 수 있다는 지적이다.
단기 불확실성 해소 관건은 '비자 문제' 해결…한미 워킹그룹서 논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연합뉴스
재계 일각에선 한국 인력의 미국 체류 안정성 확보 문제가 한미 양국의 시급한 해결 과제로 부각됐다는 점에서 불확실성이 조기에 해결될 수 있다는 기대도 감지된다.
실제로 한미 외교 당국은 비자 문제의 개선 필요성에 공감하고 워킹 그룹을 만들어 논의를 하자는 데 원칙적으로 합의했다. 양국은 단기 상용 B-1 비자 적용 범위의 명확한 지침 마련, 한국인 전문 인력의 단기 출장을 위한 비자 신설, 전문 직종 외국인을 위한 H-1B 비자 관련 한국인 쿼터 확보 문제 등을 폭넓게 논의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와 관련해 이 대통령도 "대미 투자와 관련된 비자 발급을 좀 정상적으로 운영해 달라는 취지로 미국과 협상을 하고 있다"며 "미국도 현실적인 필요가 있으면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을까 한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사태 막판에 한국인 잔류 제안을 한 점 역시 체류 규제 해결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다는 의미라는 해석이 나온다.
외교부 관계자도 구금됐던 한국인의 미국 재입국 문제와 관련해 "불이익이 없도록 하겠다는 것을 미국 측에 확인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