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 정청래 대표(오른쪽)과 김병기 원내대표가 11일 국회 본회의에서 상정된 '더센 특검법(3대 특검법 개정안)' 개정안에 대한 수정안 처리를 지켜보고 있다. 연합뉴스여야 원내대표가 특검법 수정에 관해 합의한 사항이 반나절 만에 일방적으로 파기된 사건의 전말이 점차 드러나면서, 여당 내에선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대표의 리더십에 대한 비판이 확산하고 있다.
애초 원내지도부가 영리하지 못했다는 지적도 있지만 그보다 정청래 대표에 대한 불신이 커졌다는 게 여러 의원들의 토로다. 비슷한 사례가 계속 쌓일 경우 당 내홍으로 번질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소통 다 했는데…강성 지지층 반발에 원내대표 희생양?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대표와 김병기 원내대표. 윤창원 기자
정청래 대표는 11일 야당과의 합의 파기 책임을 사실상 김병기 원내대표에게 떠넘겼다.
정 대표는 이날 오전 출근길에 기자들과 만나 "어제 협상안은 제가 수용할 수 없었고, 지도부의 뜻과도 다르기 때문에 바로 재협상을 지시했다"며 "특검법 개정의 핵심 중 핵심은 '기간 연장'인데, 연장을 안 하는 쪽으로 협상한 것은 취지와 정면으로 배치된다"고 주장했다.
당시는 특검법을 처리하기로 야당과 합의했던 국회 본회의가 약 6시간 앞두고 있던 때였다.
민주당은 돌연 3대 특검법(내란·김건희·채해병) 개정안에 관해 "다시 살펴봐야 한다"는 입장을 국민의힘에 전한 것으로 파악됐다. 전날 여야 원내대표 간 마라톤 협상 끝에 합의안을 마련한 지 반나절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러나 CBS노컷뉴스 취재 결과, 양당 원내지도부 간 합의 결과는 사전에 원내대표단과 당 지도부, 국회 법사위, 중진급 의원들 등과 긴밀하게 소통했던 것으로 파악됐다. 그럼에도 별안간간 정 대표가 "지도부 뜻과 배치된다"며 이를 뒤집은 셈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강성 지지층의 반발이 상당한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정 대표 외에도 같은 당 추미애·서영교·박주민·전현희·한준호·박선원 의원 등은 밤 사이 페이스북에 "합의안에 대한 전면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취지 입장을 전했다.
이렇게 정 대표를 비롯한 당내 의원들이 공개 반발하자 마치 원내대표단이 독단적으로 야당과 합의에 나섰던 것처럼 비쳐졌고, 비난의 화살은 김병기 원내대표에게 향하게 됐다. 다같이 소통 끝에 합의해놓고는 반발이 거세자 김 원내대표에게 책임을 뒤집어 씌운 모양새가 된 셈이다.
與, 명분·실익 놓쳐…"특검 15일 연장에 정부 조직 개편 포기"
문제는 여당 입장에서 결과적으로 명분도, 실익도 놓쳤다는 점이다.
우선 추석 전 처리를 앞둔 정부조직법에 야당이 협조하기 어렵게 됐다. 이 가운데 금융감독위원회를 신설하려면 국회 정무위, 기재위가 가동돼 관련법을 의결해야 한다.
하지만 현재 정무위원장과 기재위원장은 국민의힘 소속 윤한홍, 임의자 의원이 각각 맡고 있다. 법안 처리에 위원장이 협조하지 않는다면 신속 처리안건(패스트트랙) 카드를 꺼내야 하고 그 절차가 최소 6개월 이상 추가 소요된다는 문제가 있었다.
합의 파기로 야당을 자극한 결과, 여야 이견이 크지 않던 비쟁점법안 38건이 본회의에 오르지 못했던 것도 비판 받는 지점이다. 비의료인 문신 시술을 조건부로 허용하는 문신사법 등 이재명 대통령 공약이나 여권 주요 과제로 꼽혔던 법안도 모두 한 템포 쉬어갈 수밖에 없게 됐다.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우리가 여당이 된 지가 얼마나 됐는데 정청래 대표는 왜 아직까지 집권 '야당' 전략에 머물러 있는지 모르겠다"며 "야당이 39박 40일 필리버스터 같은 걸 추진한다고 하니까 우리로선 민생입법을 처리하려면 여야 합의가 불가피했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아울러 그렇게 해서 고친 특검법 최종 개정안이 애초 국민의힘과 합의한 내용과 대동소이했다는 점에서 '책임을 떠안은' 김병기 원내대표 측은 격분했다고 한다. 개정안의 핵심인 '내란특검 수사기간 연장' 부분이 대표적이다. 국민의힘과 합의했던 내용과 민주당의 최종 수정안 간 연장되는 수사기간 차이는 단 15일에 불과했다.
한 여당 의원은 "30일 연장하려던 것을 15일만 연장하는 것으로 합의를 본 것이다. 이렇게 협상해서 정부조직법을 통과시키면 우리에게 훨씬 유리한 것이 아니냐"며 김 원내대표가 격분했다고 전했다.
일각에서는 '별도의 플랜B' 전략이 있었는데 어그러졌다는 뒷말도 나온다.
원내지도부는 이번에 특검법 개정안을 완화하는 조건으로 정부조직 개편안을 국민의힘 측에 받아낸 뒤 추후 특검 수사가 끝나갈 때쯤 원포인트로 법안을 다시 개정해 수사 기간을 연장하는 방안도 검토한 것으로 전해졌다. 다수 의석을 이용하면 언제든 법안 처리가 가능하기 때문에, 조삼모사 식으로 눈속임 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원내대표단 핵심 관계자는 "이는 외부에 공개할 수는 없는 원내 핵심 전략 중 하나였다"면서 "의원들이 공개적으로 협상 결과를 비판하기 전에 한번이라도 원내지도부에 정확한 내용을 확인해줬으면 좋았을 것 같다"고 아쉬움을 표했다.
의원총회 중 김병기 원내대표가 "의원들이 정확한 사실 관계를 묻지도 않고 소셜미디어에 비판 글을 올리는 건 문제 아니냐"고 지적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협치 의미 퇴색…당분간 정국 경색
연합뉴스이렇게 야당과의 협상이 최종 결렬되면서 이재명 정부가 최근 내세우던 '협치' 의미가 퇴색됐다는 점도 뼈아프다. 대통령 중재를 계기로 여야 대표가 처음으로 악수를 하는 등 '해빙 모드'가 조성됐고 그 일환으로 추진되던 특검법 협상이 전부 어그러지면서 당분간 정국 경색은 불가피할 전망이다.
국민의힘에선 "잉크도 마르기도 전에 밤사이 합의가 뒤집힌다면 민주당 원내대표단의 존재 가치가 뭔지 모르겠다. 앞으로 모든 책임은 민주당에 있는 것"이라고 반발에 나섰다.
이같은 지적에 정 대표는 의총에서 "부덕의 소치"라며 사과의 뜻을 나타낸 것으로 전해졌다. 일각에선 이번 사태로 정 대표 체제 하에서 예고됐던 내홍이 터진 것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
다만 정 대표뿐 아니라 여권 전체가 이번 협상에 미숙한 모습을 보였다는 지적도 적잖다.
한 여당 초선 의원은 "원내지도부가 소통을 다 했다고는 하지만, 포장도 설명도 더 잘 했어야 했다"며 "게다가 몇몇 의원들이 본인들 튀려고 '오버'하면서 더 불을 질렀다"고 지적했다. 당 지도부의 한 관계자는 "애초 대통령이 협치를 강조하니 당에서도 나섰던 건데 문제가 불거진 뒤 대통령만 쏙 빠진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이날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협치와 타협을 얘기한 것을 보니 제가 합의하라고 시킨 것 같다는 여론이 있어서인지 저에게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며 "저는 몰랐다"고 밝혔다. 이어 "정부 조직을 개편하는 것과 내란의 진실을 규명해 엄중하게 책임을 묻는 당위와 어떻게 맞바꾸느냐"고 선을 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