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 트럼프와 김정은이 이달 말 경주 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마주하게 될까. 지난 8월 말 백악관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김정은을 만나라"고 권했다. 트럼프는 "올해 그를 만나고 싶다"고 화답했다.
트럼프는 이달 말, 취임 후 처음으로 아시아를 찾는다. 한국에는 1박 2일 정도 머물 것으로 알려졌다. 이 기간 이재명 대통령과 회담하고,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도 만날 예정이다. 빠듯한 일정이다. 그럼에도 2019년 '판문점 번개 회동' 같은 깜짝 만남이 "완전히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는 것이 정부의 입장이다. 사실은 바람에 가깝다. 과연 김정은은 다시 트럼프를 만날 준비가 되었을까.
"미국 대통령과의 만남을 거부하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트럼프 행정부 1기에서 첫 대북정책특별대표를 지낸 조셉 윤 현 주한 미국대사대리는 지난해 8월,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트럼프–김정은 회담 시즌 2'가 가능하겠느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이번 APEC을 계기로 두 사람이 만난다는 뜻은 아니지만, 결국 "언젠가는 만나게 될 것"이라는 의미다.
연합뉴스그러나 조셉 윤 대사는 북미 관계나 북핵 문제의 진전 가능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미국의 입장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북한의 입장은 더 변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트럼프가 만나자고 할 시점에 북·중, 북·러 관계, 그리고 우크라이나 전황을 김정은이 어떻게 판단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지금, 북·중과 북·러 관계는 어떤가.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지난달 베이징에서 열린 중국 전승절 80주년 행사에서 김정은은 단연 '신스틸러'였다. 핵보유국 지도자인 푸틴, 시진핑과 나란히 톈안먼 성루에 올라 존재감을 과시했다. 그는 푸틴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사실상 복원된 군사동맹을 재확인했고, 시진핑과는 '운명공동체'를 강조하며 북중 관계를 다시 다졌다. 이어 러시아와 중국은 이번 주 북한 노동당 창건 80주년 행사에 각각 자국의 '넘버 투'를 파견하며 김정은의 위상에 힘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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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조셉 윤 대사가 언급한 '북한의 입장 변화'는 이러한 북·러, 북·중 관계 강화에서 비롯된 김정은의 자신감을 반영한다. 애석하게도 지금은 '김정은의 시간'이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시간을 만들어준 것은 다름 아닌 미국, 특히 트럼프였다.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북한 외교의 중심에는 줄곧 미국이 있었다.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러시아와 중국을 마냥 신뢰할 수 없었던 김씨 정권은 오히려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체제 생존의 돌파구로 여겼다. 핵무기 개발과, 나아가 미국 본토를 위협할 수 있는 미사일 기술에 몰두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2017년 11월 29일 새벽, 북한은 미국 본토 전역을 사정권에 둔 것으로 평가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5형'을 쏘아 올렸다. 그리고 김정은은 "국가 핵무력 완성"을 선언했다. 지금까지 그 어떤 핵보유국도 자신들의 핵무기 완성을 이렇게 공개적으로 '선언'한 사례가 있었던가. 김정은은 굳이 왜? 미국을 향해 "이제 우리를 상대하라"는 정치적 외침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호응한 것이 트럼프였다.
트럼프와의 담판을 위해 65시간 넘게 기차에 몸을 실은 김정은은, 어쩌면 자신을 신대륙을 향해 항해하던 콜럼버스쯤으로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다시피, 그는 그 신대륙에서 흙 한 줌도 집어오지 못한 채 돌아와야 했다.
연합뉴스4년 만에 돌아온 트럼프는 김정은에게 신대륙을 함께 탐험해보자며 '올리브 가지'를 내밀고 있다. 김정은이 그리는 신대륙은 아마도 '인도와 파키스탄'과 같은 곳일 것이다. 핵을 보유하고도 사실상 제재를 받지 않으며, 체제의 안전을 보장받는 나라. 트럼프는 김정은에게 그런 신대륙을 선물할 수 있을까.
그러나 러시아와 중국을 통해 이미 또 다른 신대륙을 탐험하고 있는 김정은의 눈은, 예전보다 훨씬 높아졌을 것이다. 그리고 6년 전 하노이에서 트럼프가 했던 그 말을, 이제는 김정은이 중엉걸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서두를 것 없다."
박형주 칼럼니스트
- 전 VOA 기자, 『트럼프 청구서』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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