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쇼군' 호조 마사코일본 정계가 격하게 요동치고 있다. 지난 4일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전 경제안보담당상(64)이 자유민주당(자민당) 최초의 여성 총재에 선출됐다. 이어 당연히 일본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되는 줄 알았는데 암초를 만났다. 26년 동안 연립정부를 이뤄온 공명당이 이혼 도장을 찍고 떠나 버린 것이다. 온건파 이시바 시게루 현 총리와 대척점에 선 다카이치 총재의 강경 보수 노선이 화근이었다. 자민당 첫 여성 총재로 만들어 준 정치 이념이 일본 첫 여성 총리 등극에 발목을 잡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입헌군주제이자 의원내각제인 일본의 내각총리대신은 중의원(하원), 참의원(상원) 양원의 투표로 지명하는데, 결과가 엇갈릴 경우 중의원 의결에 따른다. 과반(233표) 득표자가 없으면 2차 투표의 최다 득표자가 총리로 지명된다. 자민당의 중의원 의석은 196석인데 입헌민주당(148석), 일본유신회(35석), 국민민주당(27석) 등 야 3당은 총 210석이다. 제1야당인 입헌민주당은 자민당 독주 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해 정치적 결이 다름에도 국민민주당 다마키 유이치로 대표를 총리 후보로 밀고 있다. 자민당과 결별한 공명당에게도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다카이치 총재는 공명당의 24석이 이탈하면서 13년 만에 정권을 내줄 위기에 처했다.
보수적인 근현대 일본에서 여성 통치자는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일본 역사에는 여성 텐노(천황,天皇), 여성 쇼군(將軍)까지 있었다. 일제가 조선 침략과 식민 통치를 정당화하고자 왜곡한 신화 속 인물인 진구(神功) 황후를 제외하고도 6세기 스이코(推古)부터 18세기 고사쿠라마치(後桜町)까지 8명의 여성 텐노가 존재했다. 또 12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막부(幕府) 시대에도 여성이 최고 권력자가 된 사례들이 있다. 이 중 가장 강력한 실권을 휘두른 여성으로 호조 마사코(北条政子)가 꼽힌다.
호조 마사코는 일본 최초의 무사 정권인 가마쿠라(鎌倉) 막부를 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부인으로 남편이 죽은 후 아들 쇼군들을 섭정하면서 막부의 정치‧군사권을 장악하고 정점에 섰다. 특히, 초대 정이대장군(征夷大将軍,쇼군)인 남편이 죽자 교토 조정이 막부를 타도하고자 일으킨 조큐의 난을 진압하고 이후 680년간 지속된 막부 체제의 토대를 세웠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자민당 총재. 연합뉴스호조 마사코와 다카이치 사나에는 강력한 전임 남성 지도자의 후광을 입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호조는 첫 쇼군인 남편의 정통성, 다카이치는 아베 전 총리의 정치 노선을 계승해 권력을 얻었다. 그러나 그 권력의 행사와 강화 측면에서는 차이가 있다.
호조는 천황에 맞서는 걸 주저하는 막부의 무사들 앞에서 한 역사적인 연설로 쇼군에 대한 충성심과 무사의 자부심을 격동시키며 조정군을 격퇴해 사실상 쇼군의 반열에 올랐다. 이로 인해 승려였던 호조는 '비구니 쇼군'으로 불렸다. 이후 가신들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과 대중의 여성 권력자에 대한 반감으로 일본 3대 악녀라는 오명을 쓰기도 했지만, 일본 역사서들은 "일본 왕업의 기틀을 지켰다", "여인이 이룩한 일본국" 등의 평가를 남겼다.
다마키 유이치로 일본 국민민주당 대표. 연합뉴스다카이치는 과연 현대의 호조가 될 수 있을까? 일본 관동의 강력한 호족 가문 출신인 호조와 달리, 다카이치 총재는 평범한 맞벌이 가정에서 태어나 입법 보좌관, TV 아사히 앵커 등을 거치며 오로지 자신의 실력으로 정치 리더 자리에 오른 비세습 정치인이다. 10선 의원인 그녀는 의원 동기인 아베 전 총리의 정책 및 정치적 유산을 계승하며 당내 강경 보수파를 결집시켜 총재가 됐다. 하지만 이제 더는 당연직이 아니게 된 일본 총리가 되기 위해선 자신의 노선을 수정하거나 색깔을 보정해야 한다. 봉건시대의 호조는 막부 내 무사 지지 세력을 더욱 공고화해 외부 세력을 깨뜨렸지만, 민주시대의 다카이치는 협력과 설득의 기술을 발휘해야 한다.
다카이치 총재는 선거 경쟁자였던 고이즈미 신지로 농림수산상을 방위상으로 기용하는 등 탕평 인사로 당내를 안정시키는 한편, 야당들을 다각적으로 접촉해 야권 연합을 저지하려 애쓰고 있다. 같은 보수 우파인 일본유신회와 정책 협력을 검토하고, 국민민주당에는 정치자금 스캔들 대응 협의체 구성을 제안했다. 또 안보‧에너지 정책 등을 둘러싼 야 3당간의 입장차를 파고들어 균열을 만든다는 방침이다. 아울러 여야 양쪽의 꽃놀이패를 쥐게 된 공명당에 대해서도 컴백홈을 외치며 설득에 나서고 있다.
오는 21일로 예정된 일본 국회의 총리 지명 선거 결과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