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27일 공무집행방해 사건 항소심 공판조서. 고부건 변호사 제공'살갗을 조여 오는 두려움과 공포감. 과거 군사정권 재판을 연상케 했다.' 지난 3월 27일 오전 제주지방법원 제1형사부의 심리로 열린 '공무집행방해 사건' 항소심 첫 공판에 참석한 한 방청인이 당시 법정 분위기를 설명한 내용이다. 당시 재판장인 A 부장판사가 위압적으로 재판을 진행했다는 주장이다. A 부장판사는 근무시간 음주소동 판사들 중 한 사람이다.
끝난 줄 알았는데…'공포재판' 시작
이날 제주지방법원 제1형사부는 공무집행방해와 상해 혐의로 기소돼 원심에서 각각 징역 10개월·집행유예 2년을 받은 현은정, 현진희 씨 사건 항소심 첫 공판을 진행했다. 검찰이 원심 형량이 가벼워서 부당하다는 이유로 항소해서다. 피고인들은 원심판결을 받아들여 항소하지 않았다.
이들은 농민 또는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로 2023년 3월 4일 제주교도소 앞에서 공안탄압을 규탄하는 내용의 시민단체 기자회견에 참석했다. 이 과정에서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 피고인들이 탄 법무부 호송차가 지나가자 막아섰고 이를 저지하는 경찰관들과 몸싸움하면서 사건이 불거졌다.
A 부장판사는 피고인들의 이름과 직업 등을 묻는 인정신문을 진행했다. 이후 항소사건 심리를 시작하며 공판검사의 항소 이유와 이에 대한 피고인 측 변호인 의견을 들었다. 검사와 피고인 측 변호인이 증거조사와 피고인신문은 하지 않겠다고 밝혀 곧바로 항소심 결심 공판이 진행됐다.
제주지방법원 법정 모습. 고상현 기자검찰 최종의견에 이어 변호인 최후변론, 피고인 최후진술이 이어졌다. 피고인 측 법률대리인인 고부건 변호사는 "피고인들은 각 가정에서 유일하게 경제활동 하는 사람이다.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 아픈 남편을 부양해야 할 무거운 책임을 가지고 있다"며 항소를 기각해달라고 호소했다.
보통 합의부 사건은 주심판사가 다른 배석판사들과 논의해 판결한다. 이 때문에 피고인 측은 별도의 선고기일을 정한 뒤 재판이 끝날 줄 알았지만, 이때부터 '공포재판'이 시작됐다.
"아무도 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있어라"
피고인들의 최후진술이 끝나자마자 A 부장판사는 방청석을 향해 "참관인들은 아무도 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있어라"라고 소리쳤다. 이후 법정경위들에게 피고인석과 방청석, 법정 입구 곳곳에 서도록 지시했다. 당시 공개재판이라 다른 사건 재판 관련 방청인들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한 방청인은 진술서를 통해 '앞선 재판에는 없었는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갑자기 법정경위들이 많아졌다는 생각을 했다. 죄 지은 것도 없는데 공포와 두려움을 느꼈다'라고 적었다.
법정경위들이 배치되자 A 부장판사가 "지금부터 어떠한 발언도 하지 마라. 한숨도 쉬지 마라, 탄식도 하지 마라, 눈으로만 봐라. 내가 하는 말은 요청이 아니라 명령이다. 이를 어기면 구속시키겠다. 이 말은 피고인과 변호인에게도 적용된다"고 말했다고 피고인 측과 방청인들은 기억한다.
제주지방법원. 고상현 기자갑작스러운 상황에 현은정, 현진희 씨는 바로 옆에 앉아 있던 고부건 변호사에게 조언을 구하려고 했지만, 고 변호사 역시 공포 분위기 속에서 몸이 굳은 상태여서 도울 수 없었다.
곧바로 A 부장판사는 원심 판결을 파기하고 현은정, 현진희 씨에게 각각 징역 1년 8개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이어 "도주 우려가 있다"며 피고인들을 법정 구속시켰다. 현은정 씨는 "지난주 수술 받아서 다음 주 병원 진료를 받아야 한다"고 항변했으나 A 부장판사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법정질서유지? 실상은 판사 직권남용"
공안탄압저지 및 민주수호 제주대책위원회 측은 올해 5월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와 직권남용감금, 특수협박 혐의로 A 부장판사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에 고발했다. 현재 5개월 넘도록 수사가 진행되고 있다. 지난달 피고인들은 보석으로 풀려났지만 재판 트라우마로 고통 받고 있다.
고발인 측 법률대리인인 장경욱 변호사는 고발장을 통해 "당시 법정에는 아무런 소란도 없었고 소란이 곧 벌어질 것이라 예상할 만한 정황도 전혀 없었다. 설사 소란스럽더라도 '정숙해 달라' 정도의 발언으로 충분한 상황이었다. 법정질서유지권이라 해도 사실은 직권남용"이라고 했다.
"선고 결과에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나오는 것은 인간의 본능적인 행동이다. 이 같은 행동을 한다고 구속시키겠다고 협박한 것은 피고인과 방청인, 변호인 행동의 자유라는 권리 행사를 방해한 것이다. 또 변호인의 조력, 이익이 되는 사실을 진술할 기회도 박탈당했다"고 꼬집었다.
당시 재판상황을 설명하는 방청인 진술서. 고부건 변호사 제공
그는 "A 부장판사는 배석판사들과의 합의를 위한 재판 휴정 없이 곧바로 판결을 선고했다. 법원조직법상 합의부 사건은 배석판사 합의를 거쳐 과반수로 판결의 결론을 결정해야 하는데도 합의 절차 없이 바로 판결을 선고했다. 위법한 직무집행으로 피고인들이 구속됐다"고 강조했다.
앞서 CBS노컷뉴스는 제주지방법원 소속 A 부장판사 등 3명이 지난해 6월 28일 근무시간에 술을 마시고 노래방 업주와 시비가 붙어 경찰이 출동하는 소동이 빚어졌다고 단독 보도했다. 이들이 법원의 위신을 심각하게 훼손했는데도 징계가 아닌 법원장 경고에 그친 사실도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