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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의 공포가 일상이 될 때…'헤르쉬트 077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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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마 제공얄마 제공
지난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헝가리 작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장편소설 '헤르쉬트 07769'가 번역 출간됐다. '사탄탱고'로 국내에도 알려진 그는 종말과 붕괴의 감각을 집요한 문장으로 밀어붙이는 '묵시록 문학'의 대표 작가로 꼽힌다. 이번 작품 역시 독일 튀링겐의 가상 마을 '카나(우편번호 07769)'를 무대로, 일상에 스며든 폭력과 불안을 바흐의 음악처럼 반복·변주하며 그려낸다.

소설의 주인공은 '헤르쉬트 플로리안'. 성(姓) '헤르쉬트'가 '통치와 지배'를 뜻하지만, 플로리안은 이름과 달리 어딘가 모자라고 순한 인물로 묘사된다. 힘은 세지만 온순해 마을 사람들의 잔심부름을 도우며 근근이 살아가고, 한편으로는 중등학교 지하실에서 배운 물리학 수업의 파편에 매달려 '우주적 파국'을 확신한다.

그는 자신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앙겔라 메르켈 총리에게 반복적으로 편지를 보내며 "누군가가 알아주기만 하면 사태가 멈출 것"이라는 믿음에 기대지만, 그 믿음은 점점 더 외로운 집착으로 변한다.

이 마을을 장악한 또 다른 축은 정체를 특정하기 어려운 '보스'다. 청소 회사를 운영하며 슬로건으로 'Alles Wird Rein(모든 것이 깨끗하리라)'를 내세우는데, 작품은 'rein'이 지닌 '깨끗함/순수함'의 이중 의미를 통해 '정화'와 '순혈'의 언어가 어떻게 폭력으로 이어지는지를 드러낸다. "우리는 이민자가 아니라 유대인에 집중한다"는 식의 선동, '독일 정신'이라는 명분, 그리고 '우리(WIR KOMMEN)' 같은 구호가 마을의 공기를 바꿔 놓는다.

바흐 음악은 작품의 핵심 장치다. 등장인물들에게 바흐는 예술을 넘어 신념이자 권위이며, 그 강박은 집단적 폭력과 결합해 사건을 키운다. 늑대 머리 그래피티, 마을에 번지는 '늑대' 소문과 공포, 누적되는 혐오의 말들이 이어지는 과정에서 바흐의 선율은 질서와 완벽을 상징하는 동시에, 그 질서가 현실에서 어떻게 뒤틀리는지도 보여준다.

소설은 암울한 분위기를 끝까지 유지하면서도 중간중간 아이러니와 냉소를 끼워 넣는다. 거대한 파국의 언어가 일상적 장면 속에서 과장되거나 희화화되며 오히려 현실의 불안을 더 선명하게 부각하는 방식이다.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 구소영 옮김 | 알마 | 6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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