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연합뉴스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종전 아닌 강경 타격 선언에 원자재 수급 절벽이 현실화 할 수 있다는 산업계 우려가 커지고 있다. 특히 중동 핵심 수송로인 호르무즈 해협 차단 상황 개선 문제에 대해 미국이 선을 그으면서 원자재와 물류비 상승으로 기업의 부담이 가중될 수 있다는 비관적 전망도 적지 않다.
특히 국내 석유화학(석화) 업계는 설비 구조상 미국·아프리카 등 대체 원유를 수입하는 게 어려운 상황이라 '호르무즈 리스크'에 민감하다. 당장 '산업의 쌀'로 불리는 중동산 나프타 수급에 비상이 걸리면서 석화 업계에는 '셧다운 위기감'이 여전한데다, 우리 주력 산업인 자동차와 전자, 반도체 업계에까지 긴장이 확산하는 모양새다.
사실상 내뺀 트럼프…호르무즈 통행료에 원가 상승 현실화
연합뉴스
트럼프 대통령은 1일(현지시간) 대국민 연설에서 호르무즈 해협 재개방 문제에 대해 "호르무즈 해협으로부터 석유를 수입하는 국가들은 그곳을 스스로 지켜야 할 것"이라며 사실상 방관하고 이란 발전소 타격까지 시사했다. 이처럼 미·이란 종전 협상이 결렬되자 국제 유가는 일제히 100달러를 돌파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은 이란 전쟁 장기화 시 유가가 117달러, 특히 에너지 시설 타격이 현실화하는 최악의 시나리오에서는 174달러까지 치솟는 미증유의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장기화 되는 전쟁의 직격탄을 맞고 있는 곳은 석유화학 업계다. 통상 중동에서 실은 나프타가 국내에 도착하려면 20일 이상 소요된다. 당장 호르무즈 해협이 개방돼 나프타 운송이 재개된다고 가정해도 선적, 운송 시차를 고려할 때 4월 내 수급 정상화는 사실상 불가능했는데, 종전이 불발되면서 '5월 위기설'에 불이 붙는 모양새다.
설상가상으로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 통행료 징수를 본격화하면서 정유 업계 역시 비상이 걸렸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이란은 유조선당 배럴당 1달러 수준의 '통행세'를 위안화나 스테이블코인으로 받는 안을 마련한 것으로 알려졌다. 선박 소유주부터 승무원 명단까지 제출하는 '현미경 심사'를 거쳐 국가별 등급에 따라 비용을 차등 부과할 방침인데, 초대형원유운반선(VLCC) 한 척당 최대 200만 달러(약 30억 원)에 달하는 천문학적 비용이 발생할 수 있다.
문제는 국내 정유·화학 업체 설비가 중동산 중질유에 최적화 돼 있어 대체품을 찾기도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점이다. 국내 업체 설비는 중동산 원유를 넣었을 때 가장 높은 정제 효율을 내도록 설계된 만큼 미국산 경질유 수입 비중을 늘리더라도 생산량을 정상화하기는 어렵다.
여기다 정부 정책이 친환경 기조로 돌아서면서 화석연료 설비 개선을 위한 대규모 신규 투자 역시 사실상 어렵다. 중동산 원유에 대한 의존도를 다소 낮출 수는 있지만 완전한 대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외교적 해법을 찾지 않는 한 호르무즈 통행료를 지불하는 수밖에 없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공통된 시각이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지금으로서는 원가 상승이 불가피하다. 보험료와 물류비가 천문학적으로 늘어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중동산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기존에도 미국산 등을 섞어서 썼지만 효율이 많이 떨어진다"며 "공급망을 유지하면서 비중동산을 확대하면 좋지만 쉽지는 않은 상황"이라고 부연했다.
전자·반도체·차 너도나도 '울상'
연합뉴스트럼프 대통령의 이번 연설로 전쟁의 출구가 더욱 흐릿해지자 석화 업계와 직접 연관된 자동차는 물론, 주요 제조업 전반에 불안이 짙어지고 있다.
주요 석화사들은 플라스틱(PP), 폴리우레탄(PU) 등 자동차 부품의 핵심 원료에 대해 4월 중 가격 인상을 단행하겠다고 부품사들에 통보했다고 한다. PP는 범퍼·대시보드·도어 트림 등 내외장재 전반에, PU는 시트 폼·천장재·방음재에 쓰이는 소재로, 차 한 대에 들어가는 양만 수십 킬로그램에 달한다. 고무류와 플라스틱 내장재 등을 생산하는 부품사들은 원가 상승 압박을 고스란히 떠안게 된 것이다.
자동차 부품업계 관계자는 "재고 수준이 기업이나 품목별로 상이하지만, 사태가 장기화될 경우 이달 말부터는 실제 공급 차질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고를 공급사들로부터 받고 있다"고 전했다.
통상 자동차 업계에서 두 달 치 재고를 갖고 가는 것을 감안하면 4월은 기존 물량으로 버티더라도 5월부터는 생산이 중단될 수 있다는 우려가 번지고 있다.
반도체·전자업계에서도 시장 환경 악화에 따른 긴장이 감지된다. 가전업계 관계자는 "치솟는 유가에 따른 제품 원가 상승 문제가 가장 큰 부담 요인"이라며 "단기 대응은 가능한 수준이지만, 장기화 되면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다양한 대응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반도체 산업에 대해서는 중동산 헬륨과 특수가스 등 공정용 소재 공급 차질이 우려된다는 시각도 있지만, 업계에선 이미 수개월치 재고를 확보하고 있어 별다른 지장이 없다는 설명이 대체적이다. 제품 수출을 위한 항공 운송 비용도 그 비중이 크지 않아 영향이 제한적인 것으로 파악됐다. 다만 이란 전쟁 장기화로 시장 상황이 냉각될 수 있다는 점은 반도체 업계의 주요 우려로 꼽힌다.
한 관계자는 "AI(인공지능)에 대한 대규모 투자가 이어져왔기에 반도체도 호황이었는데, 이 투자가 위축될 수 있다는 게 걱정되는 점"이라며 "중동 지역의 국부펀드도 AI 투자에 한 몫하고 있는데 전쟁으로 중동 주요국들이 자금을 조달하지 못하거나, 복구 작업에 우선적으로 자금을 쓸 경우 AI 투자가 주춤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