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증권가. 연합뉴스현 정부가 던진 자본시장 체질 개선 과제 가운데 중복상장이 최대 난제로 떠오르고 있다. 6·3 지방선거가 마무리되면서 제도 개편 논의도 속도를 내고 있지만, 주주 동의 방식과 예외 인정 범위를 둘러싼 이견이 여전해 당초 목표로 제시됐던 7월 시행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일반주주 권한 강화"…주주 동의 방식이 핵심
17일 금융당국 등에 따르면 중복상장 개선 논의는 '자회사 상장 원칙적 금지·예외적 허용' 방향으로 추진되고 있다. 자회사 상장이 모회사 주가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결과적으로 모회사 일반주주의 이익을 훼손할 수 있다는 문제의식에서다.
한국 대기업들은 물적·인적 분할을 통해 자회사를 상장하는 중복상장을 활용해왔다. LG화학-LG에너지솔루션 물적분할과 카카오가 카카오페이·카카오뱅크 등을 잇따라 상장한 사례 등이 논란이 됐다.
국내 중복상장 비율은 지난해 11월 기준 18.4%로 일본(4.38%), 미국(0.35%) 등 주요국 대비 압도적으로 높은 수준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올해 초 신년기자회견에서 중복상장을 두고
"송아지 밴 암소를 샀는데 송아지 주인이 남이면 화가 나지 않느냐"고 강하게 비판하면서 제도 개선 논의가 급물살을 탔다. 특히 지난 1월 말 코스피 지수가 5000을 돌파한 직후 "'L' 들어간 주식은 안 사"라는 제목의 보도를 언급하며이 "이런 중복상장 문제가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원인이 된다"고 질타했다.
이 대통령의 발언 당사자로 지목된 LS그룹은 증손회사 에식스솔루션즈 상장 신청을 전격 철회하기도 했다.
이처럼 이 대통령 발언으로 제도개선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됐지만 당초 당국이 7월 시행을 목표로 했던 것에 비해 진행은 다소 늦춰지고 있다. 이억원 금융위원장은 올해 5월 기자간담회에서 "5월 말부터 6월 초 사이 세부 규정 가이드라인 초안을 공개할 예정"이라고 밝혔지만, 6월 중순이 지난 현재까지도 초안은 공개되지 않고 있다. 세부 제도 설계를 둘러싼 금융위와 거래소의 조율이 예상보다 길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제도 설계의 핵심 쟁점은 투자자 보호 방안이다. 금융당국은 예외적 상장을 허용하기 위한 심사 기준으로 △영업 독립성 △경영 독립성 △투자자 보호를 제시했다. 특히 투자자 보호 측면에서 모회사 일반주주의 동의 절차를 마련하는 방안을 검토하면서 주주 동의 절차를 어떤 방식으로 설계할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시장에서는 중복상장 규제의 핵심이 일반주주 권한 강화에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대신증권 이경연 연구원은 "중복상장 규제의 핵심은 단순한 상장 심사 기준 강화가 아니라 자회사 상장이라는 자본조달 행위를 이사회의 일방적 권한에서 분리해 모회사 일반주주의 동의 절차 아래 두는 데 있다"고 설명했다.
아주대학교 경영학과 왕수봉 교수
"중복상장의 문제는 상장 자체보다 이를 통해 모회사·자회사 관계가 형성되고 피라미드형 지배구조가 강화된다는 데 있다"며 "이 과정에서
모회사 일반주주의 권익이 충분히 보호되지 않을 수 있다는 점도 논란의 배경"이라고 설명했다.
모회사 일반주주 동의 방식도 관건이다. 업계에서는 특별결의, 3%룰을 적용한 일반결의, 소수주주 다수결(MoM) 등이 거론되며 이 가운데 3%룰이 가장 현실적인 절충안으로 평가받는다.
다만
주주 보호와 기업 활동 보장 사이 균형점을 어디에 둘 것인지를 두고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거래소 관계자는 "제도 시행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갈등을 줄이기 위해 금융당국과 함께 세부 내용을 조정하는데 시간이 걸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투자자 보호냐 기업 성장이냐…벤처 업계는 '걱정'
중복상장 제도개선 공개세미나. 연합뉴스중복상장이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기대가 큰 반면, 기업의 성장 전략과 자금조달 기능을 위축시킬 수 있다는 우려도 맞서고 있다. 금융업계 관계자는
"기업 성장 측면과 투자자 보호 측면 중 어디에 무게를 두느냐에 따라 시장 결과가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는 딜레마 상황"이라고 평가했다.
일각에서는 상법 개정으로 일반주주 보호 장치가 강화된 만큼 추가 규제가 과도할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한 금융권 고위 관계자는 "상법 개정으로 주주 충실의무가 도입된 만큼 모회사 주주 보호 장치는 상당 부분 보완됐다"며
"중복상장까지 일률적으로 제한할 경우 기업의 자금조달 기능이 위축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국내에서 중복상장을 막으면 기업들이 해외 상장을 하는 방법을 택할 수 있는데, 그 경우에는 사실상 대응할 방법이 없다"고 지적했다.
재계도 최종안 도출 과정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SK그룹, HD현대그룹 등 계열사 IPO를 검토하거나 추진 중인 기업들은 규제 불확실성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분위기다. 기업들에게 IPO는 성장 자금을 확보하는 핵심 수단인 만큼 중복상장 기준 강화 여부에 따라 투자와 사업 확장 전략이 영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벤처투자 업계에서는 중복상장 규제가 혁신기업의 성장 기회를 제약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벤처캐피탈협회는 지난 15일 기자간담회를 열고 "(금융당국이 추진하는) 코스닥 세그먼트 분리나 중복상장의 일률적 규제는 인위적인 기업 서열화와 자금 절벽을 초래해 모험자본 생태계를 마비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벤처기업과 혁신성장기업, 국가전략산업 등에 대해서는 별도의 심사 기준이나 예외 규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한편 금융당국은 거래소 규정을 통해 시장에 제도를 도입한 뒤 자본시장법 개정으로 이를 법제화하는 방안을 검토했지만, 세부 기준을 둘러싼 논의가 길어지면서 일정도 불확실해진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