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계단에서 가습기 살균제로 인해 목숨을 잃은 희생자 가족들이 고인들의 유품을 전시한 모습. 황진환 기자정부가 국가배상 책임이 인정된 가습기살균제 참사와 관련해 전체 배상 재원의 30%를 국가가 부담하는 방안을 추진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나머지는 가해 기업이 부담하게 되는데, 특히 개정 특별법과 시행령에서는 원료물질 사업자의 분담률을 기존보다 높였다. 이를 적용하면 배상 재원 분담 비율은 정부 30%, 가습기살균제 사업자 48%, 원료물질 사업자 22% 수준이 될 전망이다.
배상 재원 분담 구조가 구체화되는 가운데 배상금 총액을 결정할 기준에도 관심이 쏠린다. 정부는 국가배상 가이드라인 마련을 위한 연구용역을 추진 중이다.
환경보건학계에서는 피해 정도에 따라 등급을 매겨 구제급여를 지급해 온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피해자 전원에게 동일하게 지급하는 '정부 기본 배상' 개념이 필요하다고 제언한다. 질환별 인과관계 규명이 여전히 불완전하고 피해 범위 역시 광범위한 만큼, 피해자라면 누구나 받을 수 있는 공통 위자료를 최대한 두텁게 지급해야 한다는 것이다.
불신 깊은 피해자·유족…정부, 배상 '가이드라인' 용역 추진
22일 기후에너지환경부 등에 따르면 환경·보건 분야 7개 학술단체는 지난 18일 국회입법조사처 대회의실에서 '가습기살균제 참사 국가배상체계 전환의 의미와 과제 심포지엄'을 열고 오는 10월 8일 시행되는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 및 지원을 위한 특별법'에 따른 국가배상체계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논의했다.
가습기살균제 피해를 사회적 참사로 규정하고 피해구제를 국가배상체계로 전환하기 위해 전부 개정된 특별법은 지난 4월 7일 공포됐으며, 시행령과 시행규칙도 다음 달 13일까지 입법예고 중이다. 그러나 그동안 피해구제체계가 지나치게 협소한 피해 인정 범위를 적용해 왔고, 배상금 지급 결정에 동의하면 민사재판상 화해가 성립한 것으로 간주해 사건을 종결하는 이른바 '독소조항'도 포함돼 있어 다수 피해자와 유족 사이에서는 우려가 더 큰 상황이다.
특별법이 시행되면 기존 기후부 산하 피해구제위원회는 국무총리 소속 배상심의위원회로 개편된다.
피해자와 유족 일각에서는 배상 여부와 규모를 결정하는 배상심의위원회의 재량이 지나치게 크다며 기산일, 일실수입, 위자료, 간병비, 개호비, 배상 수령 주체 등의 기준을 시행령에 명문화해 달라고 요구해 왔다. 기존 피해구제위원회에서 '등급외' 판정을 받았거나 여러 질환을 앓고도 천식이나 일부 폐질환만 피해로 인정받은 피해자들은 위원회의 자의적 해석을 경계하고 있다.
이에 국무조정실과 기후부, 한국환경산업기술원은 가습기살균제 피해 관련 손해 범위를 검토해 피해 배상 가이드라인을 마련하는 연구용역을 발주한 상태다.
이날 심포지엄은 가이드라인 마련에 앞서 △대한예방의학회 △대한직업환경의학회 △한국역학회 △한국환경법학회 △한국환경보건학회 △한국환경사회학회 △환경독성보건학회 대표로 참석한 전문가들이 관련 의견을 제시하는 자리였다. 아울러 7개 학회 대표는 '환경보건학술단체 상설협의회' 구성 협약을 체결하고 가습기살균제 참사 국가배상제도 시행 과정을 공동으로 점검하기로 했다.
지난 18일 서울 영등포구 국회도서관 4층 국회입법조사처 대회의실에서 열린 '가습기살균제 참사 국가배상체계 전환의 의미와 과제' 심포지엄에서 이관후 국회입법조사처장이 환영사를 하고 있다. 최서윤 기자 8천 명 중 6천 명 인정해도 모두가 불만족한 기존 구제체계, 왜?
기후부에 따르면 이달 기준 가습기살균제 피해 지원을 신청한 8086명 가운데 6053명이 피해자로 인정됐다. 이 중 6037명은 구제급여 지급 대상이며, 진찰·검사비 지원 대상은 56명, 긴급의료 지원 대상은 58명이다(중복 98명).
하지만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한 이들은 물론 인정받은 피해자들 역시 불만이 크다. 실질적인 피해에 상응하는 배상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대한직업환경의학회 박소영 강북삼성병원 교수는 "초기에는 피해등급을 경도~고도로 운영했는데 너무 많은 피해자가 아무 등급도 받지 못해 경미와 초고도 등급을 추가했다"며 "그러면 더 많은 피해자가 구제될 것으로 기대했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피해자가 등급외 판정을 받았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그 이유로 가습기살균제 피해가 '가역적 피해'라는 점을 꼽았다. 정부가 대법원 판결이 나기까지 책임을 회피하는 사이 시간이 흐르면서 피해 상태가 일부 회복됐고, 현재 상태를 기준으로 판정하다 보니 배상 주체에 유리한 결과가 나왔다는 설명이다.
그는 "초기에는 1년에 병원을 100번 다닌 피해자도 있었지만 15~20년이 지난 현재의 폐기능을 중심으로 피해 정도를 판정하다 보니 대부분이 회복된 상태로 평가된다"며 "당시 직장생활도 하지 못하고 정상적인 사회생활도 어려웠던 피해자들이 지금은 괜찮다는 이유로 등급외 판정을 받으면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소아 피해자나 출생 직후 노출된 피해자들은 성인보다 훨씬 심각한 건강영향이 남을 수 있고 현재 건강해 보이는 20대 피해자에게도 어떤 건강영향이 나타날지 예측하기 어렵다"며 "소아 피해는 개인의 건강 피해를 넘어 가족 돌봄 부담으로 이어지는 등 가족 전체의 피해로 확장됐지만 기존 구제제도는 이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2차 배상에서는 모든 피해자가 공통으로 받는 위자료가 최대한 높게 책정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환경보건학회 박동욱 방송통신대 보건환경안전학과 교수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법의 방향과 과제: 손해 배상 체계와 기준 설정 중심' 발표자료 캡처한국환경보건학회 박동욱 방송통신대학교 보건환경안전학과 교수도 "폐질환의 중증도나 질환 특성과 관계없이 모든 피해자에게 동일하게 지급하는 기본배상금 개념이 필요하다"며 개인 손해배상금 산정 이전에 피해자 전원에게 지급할 '정부 기본 배상금'을 먼저 정할 것을 제안했다.
박 교수는 "국가가 가습기살균제 위험을 예방하고 피해자를 감시하는 데 실패한 책임이 있으며, 이에 대한 대법원 판결도 있었다"며 "장기간 손해배상이 지연된 데 따른 보상과 함께 피해자·유족에 대한 사회적 지원과 위로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이어 "경증 피해자는 기존 피해구제체계에서 지원받은 금액이 매우 적었던 것으로 안다"며 "최소한의 피해를 입은 피해자의 형평성을 확보하기 위한 정부 지원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우선 정부 기본 배상금을 설정한 뒤, 2단계로 개인별 피해 질환과 중증도 등에 따른 손해배상금을 산정하고, 마지막 3단계로 정부의 책임 인정이 지연된 데 따른 이자 보상금을 합산해 최종 배상액을 산정해야 한다는 것이 박 교수의 제안이다.
박 교수는 정부 기본 배상금과 지연 이자 보상금은 국가가 부담하고, 개인별 피해 질환과 중증도에 따른 손해배상은 가해 기업이 부담하는 방식이 바람직하다고 제안했다. 국가가 전체 배상액의 약 30%를 부담하고, 나머지는 기업이 부담하는 구조다.
'종국적 해결'이 놓치는 것…미확인 건강영향 이어질 가능성
전문가들은 이번 국가배상이 1994년 판매가 시작돼 2011년에야 위해성이 확인된 가습기살균제 참사의 '완전하고 종국적인 해결'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는 점에도 공감했다.
한국환경사회학회 박진영 박사는 "가습기살균제 피해와 관련한 연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새로운 과학적 지식이 축적되고, 어린이 피해자가 성장하면서 새로운 건강영향이 발견될 수 있다"며 "향후 생산될 과학적 지식과 연구 결과를 제도에 반영할 수 있는 유연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환경법학회 박태현 강원대 교수는 "개정 특별법이 건강피해를 현재 확인된 피해와 치료 필요성의 범위 안에 지나치게 고정할 위험이 있다"며 "현재 '치료종결 가능'으로 분류된 건강피해 역시 향후 전신질환, 태아 피해, 정신건강 문제, 후발성 질환 등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우려했다.
박 교수는 또 "개정 특별법상 건강 모니터링이 계속치료비 지급 여부를 판단하기 위한 절차로만 기능하는 것처럼 보인다"며 "장기 모니터링은 단순 건강검진이 아니라 새로운 건강피해를 발견하고 연구하는 기반이 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가습기살균제 건강피해는 잠복성·지연성·전신성·복합성을 지닐 수 있어 노출과 질환 간 관련성, 독성 기전, 장기 건강영향, 태아기 노출 피해, 전신질환 및 정신건강 영향 등에 대한 과학적 이해는 앞으로도 연구와 장기 모니터링을 통해 계속 갱신될 수밖에 없다"며 "국가는 모니터링 결과를 연구와 기준 개선에 적극 활용할 의무가 있다"고 강조했다.
대한예방의학회 김경남 연세대 환경역학연구실 교수는 "배상체계와 피해 인정 기준을 설계할 때 가습기살균제 노출에 따른 건강영향이 현재까지 확인된 질환에만 국한되지 않을 가능성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며 "성인 노출자와 태아기·영유아기 노출자는 생애주기와 예상되는 건강영향이 서로 다른 만큼 연령과 노출 시기를 고려한 추적조사 체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특히 소아 노출자의 경우 신체 성장뿐 아니라 폐기능, 신경인지 발달, 정신건강, 학업 및 사회적 기능까지 포함한 포괄적인 평가가 요구된다"고 덧붙였다.
이동영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보건학 박사)은 "가습기살균제 참사 관련 대법원 판결은 과거 피해의 구제와 현재 피해 지원, 미래의 재발 방지 및 손해배상 책임을 국가가 부담하도록 한 사실상 유일한 사례"라고 평가했다.
다만 그는 "산업재해 인정 제도나 코로나19 예방접종 피해보상 특별법의 인과관계 추정 원칙과 비교하면,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에게는 상대적으로 엄격한 입증 책임이 요구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산재 보상체계는 특정 주체를 처벌하는 제도가 아니기 때문에 비교적 폭넓게 인정하고 보상하는 방향으로 운영돼 왔다"며 "반면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법은 (기업과의 소송이 얽혀 있는 탓에) 법원이 환경보건학자들에게도 사실상 '합리적 의심이 없을 정도의 확실성'을 요구하는 구조 속에서 만들어졌다는 아쉬움이 있다"고 말했다.
기후에너지환경부 조현수 환경보건국장이 지난 18일 국회도서관 4층 국회입법조사처 대회의실에서 열린 '가습기살균제 참사 국가배상 전환의 의미와 과제' 심포지엄에서 발언하고 있다. 최서윤 기자한편 이날 행사에 참석한 기후부 조현수 환경보건국장은 피해 인정 범위가 협소하다는 지적에 대해 "특별법 2차 개정 과정에서 인과관계 인정 범위를 대폭 확대해 기존 폐섬유화 중심에서 상기도 질환과 폐암 등 10개 질환까지 인정 범위를 넓혔다"며 "개정법 시행 이후에도 인정 질환을 확대할 수 있도록 관련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손해배상 기준과 관련해서는 "배상심의위원회 운영 과정에서 사망자, 기존 인정 피해자, 중증·경증 피해자, 미인정 피해자 등 유형별로 일관된 심의가 이뤄질 수 있도록 분과 운영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국가 부담 비율에 대해서는 "국회의 예산 심의권을 침해할 우려가 있어 법령에 직접 규정하지는 못했지만, 판례에서 국가 책임 비율을 30%로 판단한 만큼 그 범위 내에서 부담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심포지엄을 공동 주최한 국회입법조사처의 이관후 처장은 "입법조사처도 사후 입법영향 분석을 수행하는 만큼 개정 특별법이 취지에 맞게 시행되는지, 추가 입법이 필요한지 지속적으로 살펴보겠다"고 밝혔다.
다만 전국가습기살균제참사피해자연대 등 일부 피해자 단체는 기후부가 입법예고한 시행령 개정안의 위헌성을 문제 삼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검토를 요청하고, 특별법 및 시행령 개정 과정에서 담당 부처의 직무상 의무 해태가 있었다며 감사원 공익감사 청구도 준비하는 등 반발을 이어가고 있다.